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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 민주화는 대통령을 시민이 직접 뽑는 변화를 일궈냈다. 그러나 그 밖의 많은 문제들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 뒤 권위주의적 생산체제에 맞선 노동운동의 도전도 있었고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도 겪었지만, 큰 변화는 없었다. 이는 ‘박정희 시대의 발전모델’, 즉 정부가 재벌과 동맹해 경제성장을 견인하는 체제가 여전히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압도했음을 의미했다. 박근혜 정부의 출현이 가능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런 박근혜 정부의 몰락이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전개된 것은 흥미롭다. 대안세력의 성장에 의해서라기보다는, 바로 박근혜 대통령 자신의 ‘의도하지 않은 행위’의 결과로 구체제의 재생산이 위기를 맞았다. 이 과정에서 터진 2016 촛불집회가 대통령 개인의 거취에 국한하지 않고, 한국 사회 발전모델의 변화를 요구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로 보인다. 문제는 그 대안을 누가 어떻게 현실화할 수 있는가가 여전히 불확실하다는 데 있다.

외환위기 사태를 전환점으로 ‘신자유주의적 발전국가 모델’이 강화되었음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 일이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본격화되고,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거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과정에서 지금의 야당들이 어떤 대안적 발전모델을 모색하고 구체화했는지에 대한 것인데,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그간 야당들이 사회경제적인 사안들에 대해 개혁적 언사를 앞세웠다고 해도, 크게 보아 온정주의 이상은 아니었다. 적어도 온정주의적 접근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그간 진보나 보수 모두 큰 차이가 없었다고도 할 수 있다. 만약 여야를 포함해 언론과 지식인들이 말했던 공적 언어들이 모두 진짜였다면, 한국 사회는 벌써 이상사회가 되었을 것이다. 모두가 비정규직을 걱정하고, 청년 문제의 해결을 말하며, 사회 통합과 약자 보호를 강조하고, 성장만큼이나 공정한 분배를 강조했는데 현실은 왜 좋아지지 않았을까? 지금 상황도 마찬가지다. ‘박근혜 이후 체제’를 만들자 하면서 개혁 과제를 나열하고 구호화하는 것만으로 과연 다른 세상이 가능해질까.

이와 관련해 좀 더 근본적인 문제를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민주주의는 어떻게 작동해야 사회를 좀 더 공정하고, 자유롭고, 평등하게 만드는 힘으로 기능할 수 있을까? 앞선 민주주의 국가들의 경험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자본주의 체제의 양대 생산자 집단이라 할 수 있는 노동과 자본이 어느 정도 힘의 균형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 기초 위에서만이, 노동의 권리를 강화하는 동시에 ‘일에 대한 헌신’이 발휘되는 사회경제적 조건을 만들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정당들이 뚜렷한 이념적, 계층적 차이 위에서 공익의 방향을 두고 경쟁해야 한다는 점이다. 달리 말하면 ‘종류가 다른 정당들’이 민주정치를 이끌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정당들이 그런 실체적 차이를 가져야 진짜 내용을 두고 다투며, 또 그런 진짜 차이로 인해 정치적 타협과 조정을 강요받기 때문이다. 서로의 차이가 ‘정도의 문제’에 그치면 다툼은 내용 없이 격렬해질 뿐이지만, 해결이 쉽지 않은 ‘종류의 차이’를 두고 다투면 나눌 수 있는 편익을 교환해 공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사회경제적으로는 노사가, 정치적으로는 정당들이 서로 다른 가치와 이해관계를 두고 다툰다는 사실이 인정되는 기초 위에서 민주주의가 작동할 때, 좀 더 공정하고 자유롭고 평등한 공동체를 만들어 갈 가능성은 높아진다는 것이다. 이런 조건을 갖춘 민주주의가 훨씬 더 평화롭고 안정적이라는 사실을, 앞선 민주주의 국가들의 경험은 말해준다.

우리의 미래는 어떨까? 곧 다가올 20대 대선에서 야권 후보들은 ‘박근혜 체제 극복론’을 외칠 것이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정당 체계나 노사관계의 조건 위에서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지는 솔직히 상상이 안된다. 정치세력들의 정체성이 친박·반박·친문·반문으로 구분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서로에 대한 반감으로 정당들이 설명된다는 것은 누가 대통령 권력을 가질 것인가를 둘러싼 차이만 있을 뿐, 실체적으로는 별 내용을 갖고 있지 못함을 보여주는 지표이다. 따라서 누군가 무작정 박근혜 이후 체제를 말한다면 그는 지금 상황을 그저 즐기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보다는 ‘종류가 다른 정당들이 경쟁하는 동시에 타협할 수 있는 정치의 토대’를 만들고, 나아가 ‘좀 더 대등한 노사관계 위에서 생산의 주체들이 협력할 수 있는 경제’를 만들 수 있음을 말하는 사람이 진짜 박근혜 이후 체제를 준비하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노사관계와 정당 체계를 바꿀 수 있는 정치세력이 다음 정부를 이끌어야 변화는 가능하다.

박상훈 | 정치발전소 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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