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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을 탈 때면 자동인형처럼 노인들에게 자리를 양보하기 위해 들썩이던 내 엉덩이가 요즘은 무겁다. 저 노인이 태극기를 흔들어대며 막말과 무례한 행동을 서슴지 않으면서 몇 시간씩 거리에 서 있는 분은 아닐까 의구심부터 든다. 그러나 광화문광장에도 백발을 휘날리는 어르신들이 어디 한두 분인가. 광장에 서지 않았다 하더라도 존중받아 마땅할 노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럼에도 ‘태극기부대=노인’이라는 그릇된 공식이 내 머릿속에 똬리를 틀기 시작했다. 사람을 낱낱의 개별적인 존재로 보지 못하고 특정 집단의 구성원으로 싸잡아 생각하는 편견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야구방망이를 휘두르며 “탄핵되면 서울 아스팔트 길이 피로 덮일 것”이라는 발언도 서슴지 않는 폭력적인 집단과 마음으로 드잡이를 하는 사이에 내 안에서도 독버섯처럼 자라는 것이다. 저열한 분노와 경멸의 감정이 나를 삼켜 버릴까봐 나는 심호흡을 하게 된다. 그들을 닮을까봐 두려워서다.

지난 삼일절, 광화문광장에서는 촛불집회가 시작된 이후에도 탄핵 기각 쪽에서 틀어놓은 대형 스피커가 촛불 쪽을 향해 왕왕거리며 “손에 손 잡고 벽을 넘어서” “아 아 대한민국”을 반복적으로 토해내고 있었다. 탄핵 반대를 외치는 목소리들을 마주할 때마다 내가 몸으로 먼저 느끼는 극도의 불쾌감은 타자의 존재를 압살하는 이런 폭력적 태도에 관한 것이다. 정치적인 다름을 따지는 것은 이 불쾌감에 비하자면 ‘저 높은 곳에 있는’ 정신작용이다.

‘박근혜 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이 4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개최한 19번째 촛불집회에 참석한 시민들이 ‘탄핵’이라고 적힌 손팻말을 흔들고 있다. 김창길 기자

역사의 전진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진보는 이루어지기 어려운 것인가. 흉흉한 외침들이 떠다니는 거리에 서서 나는 이탈리아의 화학자이자 작가인 프리모 레비가 아우슈비츠에서 자신의 영혼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암송했던 단테의 <신곡> 한 구절을 스산한 마음으로 떠올렸다.

“그대들이 타고난 본성을 가늠하시오/ 짐승으로 살고자 태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덕과 지를 따르기 위함이라오”(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중).

‘애국 국민’을 자임하며 자신과 정치적 견해가 다른 편에 대해 “빨갱이는 죽여도 돼”라는 말을 서슴지 않는 ‘태극기부대’의 시계는 ‘공산주의자’라는 혐의만 씌워지면 양민학살도 정당화되던 한국전쟁 시기에 멈춰 있다. 그곳에 존중받아야 할 개인은 없다. 나와 다른 생각이 허용될 여지도 없다. 인권은 국가의 필요와 판단에 따라 처분될 뿐이다. 박제된 태극기가 표상하는 것은 ‘신인(神人)’으로 숭배받는 대한민국일지언정, ‘덕과 지를 따르려는’ 국민들을 주인으로 섬기는 살아있는 나라가 아니다.

그러나 2016년과 2017년의 촛불을 통해 우리는 ‘태극기’에 대해 다른 역사적 기억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칠” 것을 내게 강요하는 국가의 표상으로서가 아니라 내가 만드는 나라의 상징으로서의 저마다의 국기다.

“박근혜 탄핵”이라는 동일한 구호를 외친다 해도 광장에서 서로가 들고 선 깃발들은 달랐다. ‘성소수자 연합’의 깃발이 ‘장수풍뎅이 연구회’와 뒤섞여 있었고, ‘민주노총’과 ‘전국 집순이 연합’의 깃발이 동시에 광화문 하늘에 펄럭였다. 깃발의 크고 작음, 생각의 같고 다름, 어느 단체를 대표했느냐, 개인이냐에 따라 너는 중요하지 않으니 뒤로 물러나라, 너는 경박하다 차별하지 않았다. 광장에 나부낀 N개의 깃발들 총합이 바로 이 시대의 태극기임을 스스로 선언한 것이다.

4·19혁명 직후 쓴 산문에서 시인 김수영은 “이 벅찬 물질 만능주의의 사회 속에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정신의 구원이라고 나는 확신한다”고 호소했다. 촛불의 승리는 탄핵이 인용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광장에 넘쳤던 우정과 배려, 자존과 긍지, 정의와 희망의 순간들은 ‘짐승으로 살고자 태어나지 않았고/ 덕과 지를 따르’려고 일어섰던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새겨질 것이다. 그리하여 ‘태극기부대’가 상징했던 한 시대의 비열한 국가주의 폭력의 기억을 넘어서는 새로운 역사가 쓰여질 것이다.

정은령 | 언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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