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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태극기집회를 보면서 10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한다. 살아계셨다면 박근혜 일당의 패악과 탄핵정국에 대해 어떤 말을 하셨을까? 아버지는 초급장교로 6·25에 참전했고 작은 부상을 입어 국가유공자가 됐다. 대학 시절과 4공화국 때 ‘정치물’을 좀 먹어 젊어서는 야당과 함께 독재에 맞섰지만 나중엔 JP의 팬이 되고 말았다. 박정희에 대해선 복잡한 애증을 가졌다.

그런 아버지의 최후 순간들에 나는 중대한 인생의 진리를 보았다. 건강을 잃고 나서는, 그리고 죽음이라는 전능자·절대진리 앞에서는 다른 모든 세속의 것들과 비슷하게 정치란 게 소용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마지막 병석의 그는 평생 뜨거운 관심을 기울였던 뉴스나 신문 한 줄을 보지 않았다. 그리고 두 달여를 앞둔 대통령 선거에 대한 아무 논평 없이 숨을 거뒀다. 이 시대의 많은 자식들처럼 자주 아버지와 정치를 두고 논쟁했던 나는 섭섭했고 또 허무했다. 정치란 산 사람들의 것이고 건강한 사람들의 것이었다.

지난주에는 일본에서 1년 만에 귀국한 친구를 데리고 광화문과 시청광장을 걸었다. 군복 입은 노인 남자들이 경계근무하듯 늘어선 시청광장은 질척거렸다. 얼었던 땅이 심부에서부터 녹는지 뻘밭이 깊었다. ‘멸공의 횃불’ ‘전우가’ 따위 너무나 낡은 군가와 조·중·동과 JTBC, 문재인·박원순·박영수를 싸잡아 공격하는 독한 말들로 대기도 탁했다.

보수단체인 태극기행동본부가 2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인근에서 개최한 박근혜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에서 참가자들이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고 있다. 연합뉴스

친구가 매일 농성에 나온다는 군복 노인과 대화를 시도했다. 자식이 셋인데 큰아들이 좋은 대기업에 다닌다며 약간 자랑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집회에 이리 열심히 다니니 자식들이 걱정이 많겠어요?’라 묻자, 요즘 자식들과 연락을 잘하지 않는다고 얼버무렸다. 왜일까?

저 황혼의 열정은 도대체 뭔가? 태극기 노인들의 일부는 일종의 정체성 정치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리라. ‘내 나이가 어때서’가 집회 노래의 하나라니, 난장은 소외나 문화지체의 울부짖음인지도 모른다. 애처롭기도 하다. 그들이 자기 자식과 후손들에게 큰 부담을 주고 있다는 것만 좀 알아줬으면 좋겠다.

그러나 태극기 시위대가 모두 가난한 노인들이라 일당을 받고 집회에 동원되었다든지 그들이 무지한 저학력층이라든지 하는 생각은 일부만 맞거나, 또는 차라리 그랬으면 한다는 바람의 반영일 뿐일 테다. 그들 맨 앞줄에 서 있는 건 누군가? 명문대 출신의 자유한국당 국회의원들과 도지사 따위 그리고 타락한 목사들, 김기춘과 유사한 계통의 공안 밥벌이꾼들이다. 가난과 거리가 먼 특권동맹의 구성원들이다. 박근혜·황교안 세력의 반동과 태극기 시위대의 난장 앞에 껴 있는 종북몰이·국가주의·박정희신화·군사문화·극우 개신교는 실로 헬조선 ‘암흑의 핵심’이다. 암흑에서 뿜어나오는 쿠데타, 헌재 결정 불복, ‘빨갱이’ 살해 선동은 그 자체로 범죄며, 대한민국의 꺼먼 리비도, 현대사를 피로 물들였던 내전과 학살 유전자의 광증이다.

대형집회에서 큰 충돌은 없었다지만, 소소한 충돌과 시민들의 봉변은 다반사가 됐다. 직장에서 가까운 헌법재판소 주변도 연일 난장이다. 인근 주민들은 몇 달째 불편을 겪고 있다. 어제도 군복들과 꽤 잘 차려입은 선글라스 여성들이 함께 새된 소음을 내고 있었다. 한 여성은 동네주민으로 뵈는 다른 여성과 시비가 붙어 ‘이× 저×’, ‘어느 나라 ×이냐’며 악다구니를 하고 있었다. 자식 같은 어린 의경들 앞에서 체면이라고는 한 점도 없었다. 그런 사람들과 박근혜가 약하고 나이 든 사람들의 소외와 정체성을 이용해 먹는다.

공연한 대결의식과 정치열에 들린 어르신들에게 전해주고 싶다. 박근혜가 탄핵되면 나라가 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다. 하루빨리 물러나야 당신들 손주들이 ‘지옥(헬조선)’이라 부르는 이 나라가 조금이라도 나아진다. 이 봄이 새롭지 않으면 많은 젊은 사람들은 크게 실망하고 또 좌절할 것이다. 오늘의 정치는 내일을 위한 것이다.

이 나라에도 분명 고매한 인격과 지성을 가진 노인들이 많다. 악을 쓸 일이 아니라 침잠·성찰해야 한다. 혹 섭섭하거나 마음에 맞지 않아도 마음을 열어 젊은 사람들을 이해하려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어른’이며 ‘내 나이가 어때서?’라 주장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러나 어버이연합·박사모들이 노년들 앞줄에서 나대는 한, 얼마 안 남은 이 사회의 노인 공경 문화는 완전히 유물이 되고 세대 갈등도 돌이킬 수 없게 될 것이다. 헌재의 심판과 그에 대한 태도는 한국 ‘보수’와 ‘어른’들의 운명도 결정할 듯하다. 책임감 있는 어른 시민일 수 있을지, 아니면 구시대의 잉여나 혼용무도한 박근혜 정치의 소모품 취급을 받게 될지? 헌재의 ‘어른’들도 만장일치로 대한민국에 젊은 힘을 실어주길 기대한다.

천정환 | 성균관대 교수·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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