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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저문 나이에 다시 가슴 저린 사랑의 기대로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지난밤 창공에 유난히 크고 휘황한 달빛을 보면서도 오직 그대 생각뿐, 아침에 눈을 뜨니 창밖의 바람소리, 붉고 노란 나뭇잎들이 바스락 떨어져 날리는 풍경 속에도 그대는 있습니다.
어쩌면 십년 전 광우병 파동, 그 십년 전 IMF 정국, 또다시 그 십년 전 87혁명의 그 푸르른 청춘의 어느 날에도 그대는 거기 그 자리 서로 어깨를 마주했을지도 모릅니다. 다른 삶에 몰두해 있었을지라도 우리는 스치며 각자의 자리에서 동행해왔음에 틀림없습니다.
그 밤 한 치의 여지도 없는 공간에 서로 끼여 있는 동안 화를 내기보다 조금씩 틈을 내어 길을 내던 당신, 어쩌다 열린 작은 공간에서 꼼짝도 않고 물러설 수 없다는 듯 지긋한 눈매로 앞만 주시하고 그 작지만 큰 수호의 촛불을 반짝이던 그대의 자리, 그대의 시간. 그리고 서울광장에서 소공동을 돌아 안국동으로 나아가는 동안 사회변혁노동자당의 깃발과 대오에도 성큼 발을 맞추고 ‘박근혜 퇴진’ ‘재벌도 공범’ 구호 외치기를 놓칠세라 신경을 곤두세우고, 옆길에서 합류한 사람들에게 촛불을 돋우고 더욱 목청을 높이던 젊은 그대.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삶이 벼랑 끝에 내몰린 사람들은 까마득한 고공 크레인에도 올랐고 고압선에도 오르고 전광판에도 올랐지요. 생때같은 아이를 잃은 황망한 가슴들은 노란 리본을 달고 광화문 한복판에서, 박탈된 삶의 장소에서 끔찍한 세월을 감내해왔습니다. 그대도 크고 작은 삶의 고비들을 무수히 넘으며 여기에 이르렀을 테지요. 그것은 당신이 100만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광장을 그저 살피려 배회하지 않는 모습에서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나 또한 미흡한 인식은 현장에서 배우고 함께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그대와 함께했던 이 당당한 시민혁명의 한복판에서, 이야기할 기회가 생기면 나름의 삶의 지반에서 빛나는 언어들을 쏟아내는 사람들 속에서 부단히 배웠습니다.
그 밤 경복궁역 앞에서 다시 만난 우리는 무척 격앙되었습니다. 국정파탄의 책임을 지고 당장 퇴진하라는 청와대를 향한 거센 외침은 새벽까지 이어졌지요. 대통령이 아니라 희대의 사기꾼 범죄자가 스스로 물러날 리 만무하지만 어떤 정치적 꼼수나 야합도 국민적 분노를 거스를 수는 없습니다. 매일 파렴치한 범죄행위가 드러날 때마다, 그 어떤 결탁의 미동에도 당신은 주먹을 다시 쥘 것입니다. 현실정치란 미명하에 변혁정치의 절정들을 훼절했던 보수정치꾼들의 역사적 반동의 순간들을 떠올리며, 10년마다 주기처럼 찾아오는 분노의 광장정치를 이번만큼은 결코 저 수구세력의 빤한 야합놀음에 바꿔치기 당할 수 없다고 다짐했을 것입니다.
전 국민의 95%, 광장을 밝히고 울린 100만 촛불의 함성, 계급과 계층, 세대와 성별을 뛰어넘어 이룬 오늘의 광범한 연대는 새로운 결연을 예고합니다. 노동자들은 일터를 잃고, 농민들은 뿌리가 뽑히고, 청년들은 일터조차 없고, ‘여혐’에서 지진에 이르기까지 사회적·자연적 현상을 망라한 총체적 재난이 실은 저 기막힌 국정농단, 거기에 결탁한 권력과 자본놀음에 의한 것임이 자명해졌습니다. 이제 광장의 주역들은 너나없이 서로 아픔을 안고 보듬는 새롭고 다양한 결연으로 참다운 정치사회를 지속적으로 만들어내는 것만이 유일한 출로임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뿌리 깊은 수구보수 반동체제는 이제 균열과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국제정세 또한 미국주의의 준동으로 경제적으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폐기와 군사안보적으로 사드체제의 붕괴 등 전후체제의 해체 국면으로 접어들 것이고, 63년간 지속된 한반도 정전체제 붕괴도 눈앞에 다가올 수 있습니다.
이처럼 비상한 시국, 광화문 한복판에서 다시 해후한 그대, 박근혜 대통령을 당장 권좌에서 끌어내리는 노여움이 마침내 빛을 발하는 날, 뜨겁게 안으며 새로운 미래정치를 설계해 나갈 수 있기를 더없이 고대합니다.
백원담 | 성공회대 국제문화연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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