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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개 중 하나의 촛불이 되어 걸었다. 촛불의 바다에서 파도를 탔다. 그렇게 다양하고 많은 사람들이 광장에 모여 정의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낸 것은 분명 감동이었다. 그런데 종종 불편했다. 여성을 혐오하는 ‘○○년’ 문구들, 지적장애자라며 혐오하는 말들, 닭을 혐오하는 온갖 형상들 때문이었다. 부도덕한 정치인의 퇴진을 요구할 때, 어째서 여성, 장애인, 닭이 혐오되어야 하는가?

지금 국민이 분노하는 건 박근혜씨가 여성이어서, 지적 능력이 떨어져서, 닭을 닮아서가 아니다. 국가를 사유화한 비리와 부도덕함, 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잔인함 때문이다. 여성, 장애인, 동물을 이용한 혐오는 이 사태에서 정작 봐야 할 것을 못 보게 만든다. 문제의 본질을 흐리게 한다. 무엇보다, 당사자들에게 큰 상처이자 명예훼손이다. 여혐이나 장애인 혐오를 비판하는 목소리들은 이미 여러 진보언론,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단체와 정당 성명서 등을 통해 공론화되고 공감받고 있다. 나는 여기서 나아가, 닭 혐오는 괜찮은지 묻고자 한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닭은 닭장에” “닭 잡는 날” “닭 OUT” 등의 표어와 그림이 넘쳐나고 있다. 화나는 마음에 마음껏 비아냥거리고 욕이라도 시원하게 해 보자는 사람들 심정은 이해하지만, 문제는, 닭은 죄가 없다는 사실이다. 닭이 명예훼손 소송을 걸 수 있다면, 인간은 닭에게 엄청난 손해배상을 해야 할 것이다. 언제부터 닭이 멍청함의 대명사가 되었는지 모르지만, 닭은 사실 굉장히 똑똑하다. 공룡의 후예인 닭의 수백만년이 넘는 진화의 역사를 만만하게 보면 안된다. 닭을 반려동물로 키우는 사람들은 닭의 영리함에 놀라곤 한다. 인간에겐 인간의 지성이 있고, 코끼리에겐 코끼리의 지성이 있듯, 닭도 그들만의 지성이 있다.

목축문화와 자본주의, 인간의 식습관과 폭력의 뿌리 깊은 연관성을 보여주는 책 <월드 피스 다이어트(World Peace Diet)>에서 저자 윌 터틀은 “한 마리 닭으로 현현한 지성”이라는 표현을 쓴다. 부리로 먹을 것을 찾을 때, 공동체의 위계질서 안에서 스스로의 위치를 점할 때, 둥지를 칠 때, 새끼에게 먹이 찾는 법을 가르칠 때, 모진 더위와 추위에도 한자리에 앉아 조심스레 알을 돌보고 온도를 유지하도록 뒤집고 죽음을 각오하며 포식자로부터 새끼를 지킬 때 발현되는 닭의 지성은 놀랍다.

작년 SNS에서 많이 공유됐던 한 동영상이 있다. 소년이 팔을 벌리자 닭이 다가와 품에 쏙 안긴다. 소년은 부드러운 손길로 천천히 닭을 쓰다듬고, 닭도 소년의 품에서 편안히 안겨 있다. 많은 이들이 이 영상을 보고 닭의 다정함과 우아함에 감동받았다. 닭은 인간처럼 감정을 가진, 인간과 교감할 수 있는 동물이다. 이렇게 공감능력이 뛰어난 동물을 하필 우주에서 가장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인간을 욕하는 비유로 사용하다니. 닭의 명예를 훼손해도 너무 훼손하는 일이다. 최근 김종필씨의 회고 인터뷰를 통해 알려진 육영수씨의 별명 ‘육돼지’ 또한 돼지로선 황당할 일이다. 육씨가 살아생전 욕심이 많아서 붙여진 별명이라는데, 실제로 돼지는 욕심이 많지 않다. 적당히 먹을 만큼만 먹고 무리 내에서 약한 동료를 보살펴주기도 한다. 배가 터지도록 과식하고, 많이 가졌으면서 더 갖기를 바라고, 탐욕을 위해 전쟁을 일으키고 비리를 저지르는 건 오히려 인간이라는 종족만의 특성이다. 그런데도 인간은 자신 내부에 있는 가장 우려스러운 충동(포악, 폭식, 성욕)을 동물의 속성으로 돌린다.

역사적으로, 인간은 끊임없이 혐오의 대상을 만들어 차별하고 배제해 왔다. 유색인종, 원주민, 장애인, 이교도, 동성애자, 여성, 이민자, 집시, 빈민, 그리고 숱한 비인간 동물. 그들의 도움을 받아 집을 짓고, 황무지를 개척하고, 농사를 짓고, 자식을 낳고, 밥을 먹으면서도 그들을 혐오했다. 그 심리적 기저는 이렇다. 그들을 ‘인간 아닌 것들’로 규정짓고 혐오해야만 죄의식 없이 마음 편히 착취할 수 있고,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을 똑같은 인간으로, 또는 생명으로 바라보는 순간, 차마 그들에게 채찍질을 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동물을 대하는 방식은 인간이 인간을 대하는 방식을 바꿔놓았다. 가축을 통제하려고 사용하는 방식들(거세, 낙인, 족쇄, 채찍질)이 인간 노예를 통제하기 위해서도 사용되었다. 동물의 노예화는 인간 역사에서 이전엔 결코 볼 수 없었던 억압적 위계사회를 만들고 전쟁을 촉발시켰으며, 학살과 홀로코스트로 이어졌다. 동물과 약자를 다루는 ‘나치’식 방식에 대한 놀라운 통찰을 보여주는 책 <동물 홀로코스트>에서 역사학자 찰스 패터슨은 엘리자베스 피셔의 말을 인용한다. “동물을 착취하고 종속시키는 폭력이 여성에 대한 남성의 성적 지배의 길을 닦았고, 가부장적인 사회 구조 안에 고도의 억압적 통제를 만들어냈다.” 노예, 여성, 이민족, 식민지 원주민, 흑인, 집시 등을 인간성이 부족하고, 동물적 성격이 섞여 있다며 학대했다. 전시에는 적군이나 적국의 민간인을 동물로 치부하거나 동물로 비하함으로써 더 무자비해질 수 있도록 하였다.

‘박근혜 카르텔’ 처벌이라는 과제도 매우 중요하지만, 결국 중요한 건 우리가 바라는 세상이 어떤 세상인가 하는 토론이다. 지금 우리는 민주주의의 판을 새롭게 짜야 하는 절체절명의 기로에 서 있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섬세해져야 한다. ‘당위’와 ‘대의’에 매몰된 채 또다시, 스스로 항변할 수 없고 저항할 수 없는 최약자 계층의 희생을 요구하고 그들을 혐오의 대상으로 삼는 일은 없어야 한다.

11월12일 100만 촛불집회 사진에서 ‘닭 사형집행’ 깃발을 든 사람의 모습을 보았다. 그는 극우집단 KKK가 즐겨 입는 망토를 입고 있었다. 우연이라 하기엔 너무 많은 역사의 연관고리들이 떠오르며 소름 끼친다. ‘박하여행(박근혜 하야를 만드는 여성주의자행동)’을 본받아, ‘박하동행(박근혜 하야를 만드는 동물권 행동)’을 발족해야 할 것 같다. 첫째, 비인간 동물을 모욕할 권리가 우리에겐 없다. 둘째, 비인간 동물을 향한 혐오는 언제든 인간 약자에 대한 혐오로 돌아온다. 셋째, 차별과 배제와 희생을 요구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황윤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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