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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그래도 부담 많은 명절이 시작되는 연휴에 방영해놓고 대다수 시청자들에게 공포체험을 하게 한 <SKY캐슬>의 마지막 회를 보면서 나는 드디어 중학생 엄마가 되었다. 드라마 한 편으로 앞으로의 현실을 속단하는 것도 경솔하고, 이제 겨우 중학생이 되는 아이를 두고 입시전쟁의 서막을 연 것 같은 오두방정을 떠는 건 더더욱 우스운 일이겠지만 그래도 설레는 만큼 두렵고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직 입학하지도 않은 학교의 졸업생 학부모들에게 전해들은 좋은 사례에 기대를 품었다가 뒤따라 나오는 불합리한 사례를 듣고 겪기도 전에 성토했다가 이 나라의 교육제도를 어찌할 것인가 크게 반문했다 작게 흔들렸다 우왕좌왕하면서 마음을 잡아보려 애쓰던 와중에 정작 엉뚱하게 교복을 구입하러 가서 마음이 상했다.

12일 경기 용인시 기흥구의 한 교복 매장에서 초당고등학교 신입생 원동준군(17)이 새 교복을 입은 뒤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살피고 있다. 용인시 제공

학교에서 정한 지정업체의 교복은 확실히 다른 업체보다는 저렴했으나 옷감의 소재도 딱 그 정도로 저렴해 보였다. 8만원이나 주고 산 교복 재킷은 원단이 부직포였다. 빨아 입어야 하니 여벌을 구매할 수밖에 없는 블라우스도 한 장에 3만원이었다. 섬유로 인한 아토피가 있는 아이라 몸에 닿는 옷만은 따로 구매하고 싶었지만 가정통신문에 적혀 있는 ‘교복지도’라는 문구 때문에 할 수 없이 두 벌이나 샀다. 속에 입는 블라우스 정도는 반드시 지정된 옷을 입지 않아도 되지 않느냐 학교에 문의해보고 싶었지만 입학하기도 전에 교복을 가지고 ‘유난을 떠는’ 학부모가 된다며 주위에서 말렸다.

사이즈를 맞춰 보느라 30분 남짓 입고 있던 걸로도 아이의 목덜미는 이미 상처 난 것처럼 벌겋게 됐다. 정해진 공구 기간이 짧고, 그 기간에 가야 입학 전에 맞는 사이즈의 교복을 구입할 수 있다고 해서 기간에 맞춰서 갔는데도 사이즈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았다. 맞는 사이즈를 주문하려면 입학 이후에나 교복을 받아볼 수 있으니 이월상품이나 더 큰 사이즈를 사라 했다. 그런데 사실 교복은 대부분 한번 사서 3년을 입어야 하기 때문에 맞는 사이즈라는 개념 자체가 큰 사이즈를 의미한다. 심지어 나는 이번에 교복 치마에 숨겨진 놀라운 비밀을 알게 되었는데, 아이들이 어느 정도 성장해도 새로 옷을 구입하지 않고 입을 수 있도록 허리 상단 부분이 두 겹의 치마를 겹쳐놓은 것처럼 디자인되어 있었다. 지퍼도 안과 밖 각각 두 개였다. 추가 구입으로 인한 가계 소비의 불편을 학생들이 몸으로 고스란히 감당하는 상황이랄까. 이런 상황이 나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다른 업체를 찾아간 학부모에게서도, 다른 학교에 아이를 보내는 학부모에게서도 비슷한 불평을 들었다. 대체 이런 교복을 왜, 무슨 이유로 반드시 입어야 하는 걸까.

몇 년 전 몇 달 정도 미국 공립학교를 경험할 일이 있었는데, 그 지역의 (사립도 아닌) 공립학교가 모두 교복을 입었다. 우리가 입히는 양복 스타일도 아니고, 학교 마크가 달린 교복도 아니었다. 흔히 폴로셔츠라고 말하는 셔츠에 바지 또는 치마를 입으면 됐다. 학교마다 색깔만 달리했는데, 그마저도 한 학교가 대략 서너가지, 많게는 대여섯가지 색을 지정해서 입었고, 저렴한 대량생산 업체인 스파 브랜드에 가면 쉽게 살 수 있었다. 학교 밖에서 사복으로 입기에도 적당한 복장이었다. 체육복이 따로 없었는데, 따로 있지 않아도 될 만큼 활동성이 보장된 옷들이었다. 딱 그 정도의 제한만으로도 보수적인 어른들이 강조하는 단정함이 있었고, 딱 그 정도의 선택과 다양함으로도 아이들이 제 개성을 살릴 수 있었다. 한번 사서 3년을 입기 위해 굳이 크게 살 필요도 없고, 누가 규정한지 모르는 학생다움을 위해 불편을 감수할 필요도 없었다. 매주 금요일은 규정과 무관하게 사복을 입을 수 있는 날이었는데, 그날에도 원래의 교복을 입고 오는 아이들이 적지 않았다.

교복을 한 번도 입지 않은 세대여서일까. 교복의 장점도 모르고, 향수도 없는 나로서는 지금의 교복제도를 전혀 이해할 수 없다. 반드시 교복을 입어야만 한다면 저 정도의 융통성은 열어놓아야 하지 않을까. 어른 대접도 하지 않으면서 어른들이 입는 기성복을 흉내 낸 옷이나 입혀놓고, 지도와 단속이라니, 그게 아이들이 청소년으로 접하는 교육 현장의 첫 모습이라니, 입학도 하기 전에 아찔하다.

<한지혜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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