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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학기를 앞두고 교육 상담 전화가 잦다. 대안학교에 대해 묻는 부모들의 전화다.

목소리에서는 갈급함이 묻어나지만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면 그분들이 원하는 것이 꼭 ‘대안학교’는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대안학교에 대한 이해가 그다지 깊지 않은 것 같은데, 무조건 아이를 어느 학교로 보내면 좋을지 묻는다. 그분들이 알고 있는 대안학교는 맨날 사고만 치는 아이를 집어넣을 수 있는 ‘기숙사 학교’, 왕따로 힘들어하는 아이를 보호할 수 있는 ‘피난처’ 정도인 듯하다.

며칠 동안 이런 전화를 연이어 받으며 ‘대안학교는 문제가 있어야 보내는 곳’이라는 인식이 점점 굳어지는구나 싶다. 10여년 동안 대안학교에서 ‘사회의 통념에 줄서지 않고, 자기다운 인생을 살기’ ‘혼자 잘살기보다 더불어 행복하게 살기’를 가르쳐온 나는 이럴 때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든다.

20여년 전, 대안학교 초창기부터 ‘문제아들이 가는 곳’ ‘공부 안 하는 학교’라는 인식이 있긴 했지만, 그 이미지가 더욱 강화된 것은 공교육에서 대안교육을 흡수하면서다. 문제 학생들을 따로 모아 대안교실, 위클래스, 위스쿨을 만들면서 대안교육은 ‘보통의 교육’과 더욱 확실히 분리되기 시작했다. 전국에 번지고 있는 공립 대안학교마저 그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010년 공립 대안학교 태봉고등학교가 개교할 때 ‘공교육의 실패를 인정한다는 말이냐’ ‘대안학교는 문제아 수용소 아니냐’는 이유로 두 차례나 예산을 거부당한 것에서 공교육이 바라보는 대안교육의 위치를 확실히 알 수 있다. 아이가 입시에 치이는 게 싫어 대안학교에 지원하고자 하는 학부모에게 중3 담임교사가 말했단다. “아니, 멀쩡한 아이를 왜요?”

1997년 경남 산청에 문을 연 간디청소년학교를 시작으로 2000년대 후반까지 전국에 수백 개의 대안학교들이 생겨났다. 형태는 다양했지만 비인간적인 문명과 자본에 맞서고, 지나친 경쟁과 입시 위주의 교육에 새로운 길을 제시하며, 공동체적 삶과 생태적인 삶을 회복하는 것이 설립의 주된 목적이었다.

일반학교에 다니기 힘든 아이들, 장애가 있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별 문제가 없는 아이들이 훨씬 많았다. 건강한 다수의 아이들이 힘든 친구들을 끌고 가며 함께 성장했다. 그건 제도나 규칙이 아니라 삶의 문제를 함께 풀어가는 문화 속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상호작용이었다. 그 과정에서 깊어지고 넓어지는 아이들의 내면을 엿볼 수 있는 것이 교사로서 큰 기쁨과 보람이었다. 공교육에서 품지 못하는 소위 문제아 혹은 부적응아를 감당하는 것이 시대가 요구하는 대안학교의 역할이라면 그 또한 외면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다 해도 지금과 같은 격리와 수용의 방식은 틀렸다.

진보교육감 당선 이후 공교육이 많은 변화를 꾀하고 있지만 여전히 학교 바깥의 세계가 필요한 아이들이 있다. 근대학교의 틀을 더 과감히 벗어나 교육 생태계를 다양하게 만드는 실험들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 도전과 실험에 전제할 것은 대안교육이 낙오된 자, 격리된 자, 실패한 자를 수용하는 집합소가 아니라는 인식의 변화이다. 그 공간에 머무는 것으로 스스로 꼬리표를 달고 살아가게 될 아이들이 어떤 교육적 효과를 얻게 될까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장희숙 교육지 ‘민들레’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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