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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어느 추운 밤, 처진 어깨로 귀가한 주인공이 마들렌 과자 한 쪽을 홍차에 적셔 먹는다. 순간 그는 어릴 적 일요일 아침 고모할머니가 숟가락으로 떠서 입에 넣어주던, 보리수차에 적신 마들렌의 미각을 떠올린다. 동시에 당시 광장이며 오솔길, 마을과 정원이 형태와 견고함을 갖추며 찻잔에서 솟아남을 느낀다.

이제 너무 유명해진 이 장면은 여러 저술에서 언급되었고, 그중 하나가 오카 마리의 연구서 <기억 서사>이다. 책의 저자는 마트에서 사온 서양배 주스를 컵에 따라 한 모금 넘기는 순간, 오래전 이집트 유학 당시 하숙집 아주머니가 후식으로 내어주던 서양배의 미각과 더불어 한 시절이 또렷이 복각되던 경험에 관해 말한다. 개인적으로는 이 일화가 마들렌 예시보다 더 와 닿았는데, 바로 서양배라는 소재 때문이었다.

대학원 시절, 같은 연구실 선배가 구동독 지역으로 유학을 떠났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재학시기가 겹치진 않았으나, ‘학부생이 올려다본 똑똑한 조교 오빠’ 같던 그가 사형(師兄)임이 남몰래 자랑스러웠다. 사람이 멋있으니 낯선 구동독 지역인 것도 어딘가 근사하게 느껴졌다. 생경한 이름의 그 도시로 가면 다들 선배처럼 낡은 외투 걸치고, 까슬까슬 야윈 얼굴로 소리 없이 ‘파’ 웃으며 맥주잔을 기울일 것 같았다.

언젠가 필요한 국내논문자료가 있다고 하셔서 구해 보냈더니 답메일에 ‘배 삼형제’란 제목의 사진이 첨부되어 왔다. 날마다 도서관에서 돌아오는 길에 서양배 몇 알을 사서, 저녁식사 후 룰루랄라 깎아 먹는다 하셨다. “그게 요즘 내 낙이다”라면서. 담백한 그 어조도 괜히 나는 좋았다. 한참 지나 다른 나라에서 맛본 서양배는 단감과 무를 섞은 듯 묘한 식감에 달지도 새콤하지도 않았지만, 종종 사서 깎아 먹었다. 그때마다 상상 속 구동독 지역 도서관과 과일가게, 고단한 얼굴로 과일 깎는 선배가 눈앞에 그려졌다. 서양배는 통상적으로 영국배(English pear)라 불리고 내가 그걸 처음 먹어본 나라는 미국이었지만, 나에겐 ‘독일’이란 단어와 유사한 온도와 빛깔을 지닌 낱말이 되었다.

여러 해 흘러, 바로 그 독일의 한 대학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러 가게 되었다. 도움 주신 선생님께 출국인사 드릴 겸 연구실로 찾아뵈었다. 이런저런 조언을 하던 그분이 문득 생각난 듯 하얀 아스파라거스 시즌이 곧 시작될 텐데 대단히 맛난 계절채소이니 반드시 먹어보라 하셨다. 독일어로 슈파겔이라 부른단다. “이소영 선생 요리 실력은 안 봐도 짐작되지만 그건 물에 데치기만 하면 되니 괜찮아” 하시면서 말이다.

도착한 첫 주에 장을 보러 가니 과연 슈파겔(Spargel)이라 적힌 푯말 아래 ‘마’처럼 생긴 하얀 채소들이 쌓여 있었다. 한 봉지 사서 데치고 얇은 껍질을 벗겨 속살을 베어 물었더니, 파 줄기 맛이었다. 소금 치고 버터 조각 녹여 넣어도 대파의 흰색 줄기 맛만 계속 났다. 그 채소와 황금궁합이라던 어떤 소스를 곁들이니 이번엔 느끼한 파 줄기 맛이 났다.

그럼에도 시장 갈 때마다 장바구니에 담곤 했다. 외워둔 강의안을 잊어버려 정전 같은 정적이 흘렀던 첫수업 날에, “시신을 염하다”를 ‘솔트’란 단어로 표현해버렸던 부끄러운 날에, 수업준비하다 지쳐 뒷산 양떼 사이에서 울었던 날에 늦은 밤 철 이른 슈파겔을 먹었다. 베를린필 연주회 보러가고자 푼푼이 모아둔 돈을 털어 한국으로 면접 다녀온 밤과, 그로부터 일주일 후 지구 저편에서 “축하합니다”로 시작되는 메시지를 받고 해처럼 웃었던 이른 새벽, 이번에는 통통해진 제철 슈파겔을 먹었다. 그리고 학생들이 주먹으로 책상 탕탕 두드리는 게르만식 박수를 쳐준 종강일 저녁, 마침내 삭아서 보드라워진 끝물 슈파겔을 먹었다.  

타인에게 선물한 음악은 상대로 하여금 날 기억하게 만드는 반면 책은 내가 상대를 기억하는 매개체가 된다고 어느 작가가 썼다지만, 기억은 매개체가 무엇인지에 따라 달리 남는 건 아니라 생각한다. 좋은 사람과 고마운 사람은 음악이나 책뿐만 아니라 과일이나 채소 안에서도 아련한 한 시절이 형태와 견고함을 갖추며 솟아나게 할 수 있다. 내게 서양배와 하얀 아스파라거스가 그랬던 것처럼.

<이소영 | 제주대 교수 사회교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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