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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초 <30년에 300년을 산 사람은 어떻게 자기 자신일 수 있을까>라는 긴 제목의 에세이집을 낸 적이 있다. 책 내용은 제목 그대로였다. 1960년대 이른바 경제 근대화가 시작된 이후 우리 경제는 서구에서 300년 만에 이루어진 변화를 불과 30년 만에 이루어냈다. 참으로 놀랍고 무서운 속도였다. 그 긴 제목의 에세이집은 이러한 맹렬한 변화 속도 속에서 과연 온전한 인간으로서의 자기정립은 가능할까 하는 물음으로 시작하고 있다. 우리는 혹시 맹렬한 속도 속에서 갈가리 찢겨져 자신을 잃어버린 채 부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이제 한번쯤 느릿느릿할 수밖에 없는 인간 삶의 속도에 비추어 이 맹렬한 속도를 반성적으로 성찰해봐야 하는 게 아닐까, 그래야만 성숙한 삶과 성숙한 사회가 가능한 게 아닐까 하는 물음을 담고 있는 그 에세이집은 7000~8000부 나가고 언젠가 절판되었다.

그런데 20년 넘게 지나 가끔 그 책을 구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연락을 받기도 하고, 유명한 방송인이면서 작가인 모씨가 자기 책에 참고했다고 언급해서 그런지 간혹 인터넷에서 책 제목을 보곤 한다. 새삼 왜 이러지? 이제 한 지식인의 자기성찰 차원을 넘어서 사회적, 제도적, 정책적 차원에서 맹렬했던 산업사회의 속도에 대해 반성적으로 성찰하지 않으면 안되는 시점에 온 것일까? 하기는 이른바 4차 산업혁명 시대, 인공지능 자동화 시대로 접어들면서 서구 선진국의 지식과 모델을 빨리빨리 받아들여 하루라도 빨리 선진국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산업사회 패러다임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업사회 패러다임을 버리지 않고 추종할 경우 어떤 참혹한 결과를 가져오는가는 4대강 사업이 잘 보여주고 있다.

강은 그걸 중심으로 자연생태계가 형성되어 유지되고 그에 기반하여 인간의 생활생태계가 형성·유지되는 장이며, 그 기억들이 축적되어 미래로 이어지는 역사의 장이기도 하다. 여기에 흐르는 시간은 느리고 유장하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 깃들여 사는 내부자의 시각을 잃지 않는다면 강을 단기간에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기 어렵다. 4대강 사업을 추진한 주체의 시각은 강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자연생태계와 생활생태계, 역사의 장을 원천적으로 배제하는 외부자의 시각이다. 그 모든 걸 원천적으로 배제한 채 강을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고 정해진 5년 임기 내의 가시적 성과를 위해 파헤쳤다. 그 결과는 강의 부패와 수중생물들의 죽음, 회복하기 어려운 생활생태계의 왜곡과 역사의 장의 파괴다.

교육이라고 해서 4대강 사업보다 나을까? 그렇게 나아 보이지 않는다. 교육은 최종적으로 교수자와 학습자의 관계에 의해 완성된다는 점에서 인간 삶의 느릿느릿한 시간이 한 축으로 작동하는 영역이다. 그렇기 때문에 외부자의 시각에 입각한 산업화의 맹렬한 속도가 일방적으로 작동해서는 곤란하다. 그런데 현실은 그 곤란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서구의 새로운 지식을 하루빨리 받아들여 될 수 있으면 짧은 시간에 많은 사람에게 주입·암기케 함으로써 하루빨리 서구 선진국을 따라잡아야 한다”를 모토로 하는 산업화 시대 학교교육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강력한 수단 중 하나였다. 이렇게 해서 서구에서 수입된 지식을 얼마나 잘 암기했나를 측정하는 시험으로 학교와 학생을 줄 세우고 학생은 자신의 적성이나 특기에 상관없이 점수에 따라 상급학교에 진학하는 산업사회 교육체계가 형성된다. 이런 교육체계에서는 교수자와 학습자 삶의 느릿느릿한 시간이 작동할 여지는 없다. 이러한 산업사회 교육체계는 지능정보화 사회인 오늘날에도 별로 달라지지 않은 채 관성적으로 지속되고 있다.

여전히 획일적 서열화 경쟁 속에서 학생들은 자기 삶의 시간을 배제한 채 밖에서 요구하는 속도에 따른 선택을 하고 있으며, 교육정책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시대의 5년 미만의 주기를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 어떻게 하면 한국의 교육에 외부에서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속도와 함께 교수자와 학습자 삶의 느릿느릿한 시간이 중요한 축으로 작동하도록 할 수 있을까?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보면 국가교육위원회는 매우 재미있는 시도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이래 관성화된 5년 미만 교육정책 입안과 실행 주기를 새로운 교육 거버넌스를 통해 10년, 20년의 주기로 늘리겠다는 건데, 그것 자체가 산업화 시대의 맹렬하고 맹목적인 속도에 대한 제도적 반성과 성찰로 볼 수도 있어 무척 흥미롭다.  어제 구로 마을축제에 뮤지컬 공연을 준비하는 학생들 연습을 보러 갔다. 교실에선 죽어 있던 아이들의 눈빛이 노래하며 동작을 펼치는 속에서 반짝반짝 빛을 내며 살아났다. 학교교육 체계에 눌려 있던 아이들 삶의 시간이 살아난다고나 할까? 그러한 눈빛은 아이들을 변화시키고 아이들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킨다. 무엇이 진정한 교육일까?

우리의 학교는 낙타들에게 곁눈질 하지 말고 될 수 있으면 빠른 속도로 사막을 건너 풀과 숲이 우거진 녹지로 가라고만 가르친다. 그러나 소수의 낙타만이 사막을 건너고 대다수 낙타는 사막에 남는다. 학교는 사막에 남는 낙타들에게 너는 낙오했다고 말할 뿐 사막에서 사는 법을 결코 가르쳐주지 않는다. 하지만 사막을 푸른 초지로 바꾸는 것은 이 버려진 낙타들이다. 이 낙타들이 자기 삶의 시간에 눈뜰 때 학교와 사회가 정말로 바뀔 것이다.

<김진경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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