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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의학은 의학으로 대접받지 못했던 긴 세월이 있었다. 정신의학의 역사는 그래서 병원에서 시작하지 않고 수용소(asylum)에서 시작되었다. 물론 그 이전의 정신과 환자들은 거리나 산속에 버려지거나, 귀신이나 마녀, 이단적 존재로 여겨져 죽임을 당했다. 병으로 치료받아야 할 존재가 아니라 수용과 격리의 대상이었고, 또 족쇄도 찼어야 했다. 다른 어떤 질병 분야에 존재하지 않았던 도덕치료(moral treatment)가 상기되어야 할 중요한 지식의 하나가 된 이유는 도덕이 고려되지 않는 치료를 해도 되었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수용소를 넘어, 도덕치료를 경유해서, 질병으로 인정받고 치료의 대상자가 되기까지는 지난한 세월과 투쟁이 있었다. 정신질환의 격리를 반대하는 투쟁은 국가 혹은 지역사회를 대상으로 20세기 중반에야 서양의 많은 나라들에서 전개되어 미국, 이탈리아, 아일랜드 등에서 탈원화정책이 단행되었고, 정신질환자들의 주치료가 지역사회에서의 치료임을 입증하였다. 즉 격리가 질환을 악화시키고, 함께 사는 재활이 더 치료적이라는 것을 입증해온 역사였다.

또 정신질환에 대한 편견과 차별로 인하여 정신의학자, 반정신의학(anti-psychiatry)을 주장한 학자와 시민들은 각기 자기 자리에서 다른 방식으로 사회와 싸워왔었다. 정신의학자는 정신의학의 성과에 기초해 더 다양한 치료가 필요하다고 주장해왔고, 반정신의학자들은 정상과 비정상, 광기의 건강성과 진정성에 대한 침범을 정신의학자들이 학문과 산업적 논리로 저지른다고 비난해왔다. 하지만 두 진영이 동시에 싸워온 것도 있다. 그것은 정신질환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었다. 캠페인도 하고, 교육도 하고, 실제 학문적 연구를 통하여 근거 없는 편견을 몰아내고, 인권적 차원에서 차별을 금지하도록 법제정도 추진해왔다. 나라마다 다르지만 자신들의 특수성을 기반으로 다양한 제례와 의식을 통해 정신건강에 대한 계몽과 지식의 향상을 위해 노력해왔고 그래서 정신건강의날, 조현병의날, 조울증의날, 우울증의날 등을 정하고 사람들의 두려움을 해방시키기 위하여 노력해온 것이다.

정신건강 분야의 최후진국에 속하는 우리나라는 1970년대 민간에서 편견과 차별에 반대하는 정신건강의날을 추진했었다. 한국인의 편견을 상징하는 의미로 죽을 사자가 두 번 들어있다는 4월4일을 정신건강의날로 정했었다. 하지만 유신시대를 건너오며 이런 집단행위는 사라졌었다. 한참을 지나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뒤 1994년 4월에 정신과 의사 김병후씨를 비롯한 청년의사들의 노력으로 부활되었다.

이 행사의 성공으로 점차 정신건강의날이 확대되어 민간이 펼치는 가장 큰 정신건강 캠페인의 하나로 최근까지 진행되어왔다. 그런데 기가 막힌 일이 벌어졌다. 그것도 문재인 정부하에서. 정신보건복지법의 개정과 함께 보건복지부가 정신건강의날 1회를 자신들끼리 하기로 선포한 것이다. 민간에 대한 아무 동의를 구하는 일도 없이 복지부 정신건강정책과라는 동아리에서 장관과 함께 표창도 하고 구시대적이고 연례적인 행사를 치른다고 한다. 그까짓 행사 하나 복지부의 작은 과에서 한다고 하는 것에 신경질적인 잔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다. 정신보건 실무자, 가족, 당사자, 관련 학자들이 모두 소중히 여겨온 국가 차원에서의 캠페인과 행사를 송두리째 바꾸어놓았다. 그리고 참석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문자 혹은 e메일로 답하라고 한다. 김영삼, 김대중 정부를 거쳐 노무현 정부 시절까지는 누구나 참석할 수 있는 광장에서 개최되고 축제와 같은 날 중의 하나로 편견과 차별에 대한 주장을 마음껏 외쳐도 되는 해방의 날이었다. 그런데 다시 높으신 장관님 모시고 이명박·박근혜식으로 하자고 한다.

적폐는 이런 것이다. 광장의 정부인 것을 잘 모르는 관료들이 아직 너무 많다. 시민을 동원의 대상, 개·돼지로 생각하는 관료들이 시간 맞추어 오라는 인원동원식 행사에 갈 이유가 없다. 그러고 보니 저 공무원들이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9년을 지내왔다는 것을 처절히 깨달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현수 | 명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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