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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앞 자유발언대 트럭에 선 초등학교 5학년 아이와 진주의 19살 젊음이의 명징한 정치발언, 민회나 시민평의회 논의 등을 보면 오늘의 광장은 촛불만 밝히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제까지 보지 못한 정동(情動)의 정치가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요즘 일본을 비롯해 세계적으로 담론화되고 있는 ‘스트리트의 사상’(모리 요시타카), 그리고 분노의 정동이 자본과 권력에 의한 ‘하이재킹 당하는’(이토 마모루) 국면과도 다르다. 타격 대상에 대한 즉각적인 정치적 단죄를 이루고 아래로부터 정치사회를 구성해 가고자 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직접정치 실험이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다.

돌이켜보면 박근혜 수구체제는 ‘잘살아보세’의 유신망령과 허구적 복지담론을 한국 사회가 허용한 결과이다. 미국발 금융위기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정권이 신자유주의 자본축적 체제를 강화하고 민중적 삶을 보편적 피해상황으로 내몰았지만 한국 사회는 대안체제를 만들어내지 못했던 것이다. 이번 국정농단 사태가 아니더라도 노동자 민중과 청년실업 등 경제적 불평등 문제는 이미 사회적으로 깊을 대로 깊어진 상태였다. 촛불의 분노가 정유라 이화여대 입시부정이라는 차별과 배제의 문제에서 촉발됐듯이 신자유주의적 착취구조의 모순이 정치적 주체의 신체에 각인된 가운데 촛불항거는 일시에, 그리고 순식간에 확산됐다. 따라서 국민의 95%가 지지하는 광장의 정치는 박근혜의 탄핵과 보수정권의 해체는 물론 그 정치구조와 신자유주의체제 자체의 극복을 지향한다.

지금 세계 자본주의는 전후 체제의 재편이라고 할 만큼 위기를 맞고 있다. 공황이 노동자 민중의 보편적 고통으로 전가되면서 각지에서는 광범위한 투쟁이 전개되고 있다. 시리아 내전 이후 국제 난민이 급증한 가운데 전후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는 더욱 심화되고 있다. 그리하여 2008년 이후 불타오른 세계적인 반신자유주의 투쟁의 불길과 그 정치적 조직화 사례들은 오늘 광장정치의 미래에 중요한 참조체계가 되고 있다.

특히 스페인의 포데모스는 파업과 광장의 투쟁을 거리에서 정치적으로 조직해 낸 중요한 실례이다. 광화문광장 투쟁을 주도하는 1500개 시민사회단체들은 물론 지역시민들은 포데모스를 모델로 시민평의회 구성을 기반으로 한 방안을 헌법으로 제정할 것을 요구하는 기획을 가시화하고자 한다. 광장을 천막으로 발랄하게 점거한 예술행동진영은 국민권력 시대를 요구하며 다양한 공론장을 열고 있다. ‘성토 공간’에서는 페미니즘과 소수자 정치의 요구를 ‘사소한’ 일로 간주하는 낡은 가르침의 반복을 끊고 해방의 자리를 펼쳐내려는 움직임도 활발하다. 광장의 요구를 민주노총 주도의 사회헌장으로 명시해낼 필요성도 제기됐다. 당면 투쟁을 정치적으로 조직화하고, 대선을 매개로 한 정치적 수렴구조를 광장연대와 같은 유연한 정치형태로 실현해가고자 하는 좌파정당의 움직임도 있다. 전 국민의 95%가 함께 분노한 정치적 경험이 만들어낸 아래로부터의 새로운 정치사회, 그것은 보다 치열한 생산적 쟁론을 통해 더욱 단단해질 수 있을 것이다.

탄핵소추안 통과 다음날 중국 광저우에서 열린 ‘일대일로, 창의와 전 지구화의 새로운 모델’ 회의에 갔다. 광저우 사회과학원 주최로 5대륙 학자들이 함께한 자리에서 왕샤오밍 교수는 경제활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사고 수준을 넘지 않으면 일대일로는 전도를 열 수 없다고 단언했다. 나는 경제적 세계전략으로서의 일대일로의 사상적 기초가 무엇인지를 캐묻는 한편 새로운 국제질서는 다원평등한 구조가 되어야 하며, 그를 위해 주변 국가가 안고 있는 정치사회의 문제인식을 공유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했다. 한국의 사드 배치로 중국이 경제제재를 가하고 있지만 오늘의 광장정치가 새로운 민주정치의 경로를 열어낼 수 있다면 관계의 전화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사실은 말할 나위가 없다.

백원담 | 성공회대 교수·국제문화연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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