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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정 분야를 공부하면서 늘 의아한 주제가 국민건강보험이다. 올해 건강보험의 지출은 70조원으로 우리나라 사회보험에서 독보적이다(장기요양 포함). 아니 어느 행정부처보다 많다. 31조원의 국방부, 40조원의 국토교통부는 가볍게 제치고 자신의 상관인 보건복지부 63조원보다 많다. 현재 지출이 가장 많은 교육부가 68조원이니 실제론 우리나라에서 건강보험공단이 최대 부처라 말할 수도 있다.

재정은 국민들이 의무적으로 납부하는 돈이다. 당연히 수입과 지출은 국민의 대표자인 의회의 심의를 거쳐야 한다. 건강보험도 주요 수입이 가입자가 소득에 따라 납부하는 보험료이고, 지출 방식도 법정 기구에서 정해진다. 그런데 건강보험의 재정은 국회가 확정한 올해 정부총지출 429조원에서 빠져 있다. 정부가 지원하는 약 9조원만 계산되고 나머지는 국가재정, 즉 기획재정부의 총괄 편성 및 국회의 심의 밖에 있다. 건강보험공단이라는 공공기관의 일반회계로서 보건복지부의 승인을 받을 뿐이다.

대한의사협회 회원들이 5월 20일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건강보험의 보장성을 강화하는 ‘문재인케어’ 철회를 요구하며 제2차 총궐기대회를 열고 있다. 정부는 의료비에서 건강보험으로 보장되는 비중을 현재의 63% 수준에서 2022년까지 70%대로 끌어올리려 하고 있으나, 의사들은 ‘비급여’ 항목이 줄면 낮은 건보 수가만으로는 의료시설을 운영할 수 없다며 반대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건강보험이 처음 도입될 당시에는 불가피한 사연이 있었다. 건강보험은 시작부터 단일 체계로 운영된 산재보험이나 고용보험과 달리, 수백개의 지역·회사별 조합으로 출발했다. 조합마다 보험료율이 다르고 독립채산제로 운용되어 국가재정으로 편입되기 어려웠다. 이후 이러한 조합주의 방식에선 재정 형편이 조합마다 달라 전국적으로 보장성을 확대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확인되었고, 노동·시민단체의 적극적 활동에 힘입어 2000년대 들어 지금의 건강보험으로 조직과 돈주머니가 모두 통합되었다. 명실상부하게 국가재정으로서 자격을 갖춘 셈이다. 우리나라 국가재정법에선 어떠한 사업이 국가재정에 속하려면 일반회계, 특별회계, 기금 중 하나의 옷을 입어야 한다. 다른 사회보험들이 산재보험기금, 고용보험기금 방식을 택하듯이 건강보험도 기금으로 전환하면 된다.

그럼에도 기금화 논의는 오랫동안 등장하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무엇보다 이해관계자들의 자율 협상 취지가 훼손된다는 비판이 영향을 미쳤다. 현재 건강보험의 보험료, 보장 범위 등 핵심 사안들은 가입자단체, 의료공급자, 공익위원이 3분의 1씩 참여하는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이하 건정심)에서 결정되는데, 기금화가 되면 국회가 보험료, 급여 등을 함부로 정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형식 논리로 보면, 국회가 심의권을 지니기에 제기될 수 있는 걱정이다. 하지만 현행 국가재정 체계에서도 보험료와 보장성 범위를 결정하는 권한은 계속 사회적 기구에 둘 수 있다. 지금 산재보험, 고용보험에서도 노동자, 사용자, 공익위원이 모인 위원회가 보험료율을 사실상 의결한다. 건강보험도 기금화가 되더라도 이해관계자 대표들이 지금처럼 건정심에서 보험료뿐만 아니라 보장 항목까지 다루면 된다. 집은 그대로 두고 문패만 바꾸는 작업이기에 제도적으로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얼마 전 대통령 직속 재정개혁특별위원회도 건강보험의 기금화를 권고했다. 건강보험이 국민이 의무적으로 내는 돈으로 운영되고, 특히 어느 부처보다 많은 재정을 지닌 제도이기에 국가재정으로 통합해 수입과 지출을 국회가 감독하고 국민은 투명하게 파악하자는 지극히 상식적인 제안이다.

결국 기금화를 표류시켜 온 실질적 쟁점은 건강보험을 둘러싼 정치에 있다. 나는 이해관계자들이 기금화를 불편해하는 배경으로, ‘자율성’이라는 이름으로 기존 방식에 안주하려는 관성을 주목한다. 매년 건강보험료를 조정하고 보장성 범위를 정하는 건정심의 존재를 아는 국민이 얼마나 될까? 가계에 큰 영향을 미치는 민감한 주제인데도 어디서 결정되는지 알려져 있지 않다면, 위원회에 참여하는 단체들이 대표자 역할을 다하지 못한 거다. 조직과 재정을 통합했음에도 건강보험의 보장성이 그대로인 책임에서도 자유롭지 않다. 기금화 반대 주장이 곧이 들리지 않는 이유이다.

이제 건강보험 재정을 제자리에 놓자. 더 많은 사람들이 들여다볼수록 사회적 논의는 활성화된다. 기금화는 당사자의 자율협상을 존중하면서도 건강보험의 의사결정과정에 활력을 부여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국회는 전체 지출을 점검하고, 건정심은 일반 시민들과 소통하라. 근래 현안인 문재인케어의 비급여의 급여화, 보장성 강화, 보험료 인상 등도 모두 건정심이 의결하는 사안이다. 한발 더 나아가, 병원비 대책으로 계속 민간의료보험에 가입해야 할지, 아예 보험료를 더 내서라도 건강보험 하나로 해결할지를 주제로 건정심이 전국 순회 토론을 주관할 수는 없는가. 앞으로 건강보험의 의사결정과정에 새 바람이 불기 바란다. 기금화도 그 방향의 길이다.

<오건호 | 내가만드는복지국가 공동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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