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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캠프 보조교사를 한 적이 있다. 대학원 다닐 무렵 어느 초여름, 성당 초등부 여름캠프를 도울 일손이 필요하다기에 자원했던 것이다. 신부님은 몇 번이나 괜찮겠냐고 물으셨다. 종교단체활동을 해보지 않아 분위기에 적응하기 쉽지 않을 거라 하셨다.

괜찮다고 호기롭게 답했지만, 그렇지 않으리라는 것은 버스에 올라타던 순간부터 직감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난 어린아이들을 가까이서 대해본 적이 거의 없었다. 사랑스럽다는 생각은 들었으나 그 사랑스러움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몰랐다. ‘철수야! 안녕?’ ‘영희야! 놀자’ ‘바둑이 멍멍!’ 정도가 당시 알던 어린이세계의 전부였다. 주일학교 선생님들이 앞에서 귀여운 율동을 시범 보일 때면 나한테도 따라 하라 시킬까봐 두려워, 뒤편에서 짐 나르는 시늉을 하였다.

첫날 저녁, ‘나눔’ 프로그램이 진행되었다. 그때껏 내가 경험한 ‘나눔’이라곤 학부시절 농활 가서 갖던 평가시간 혹은 우회적으로 상대방 논지를 비판하는 토론기술 정도였다. 촛불 켜고 빙 둘러앉아 노래 부르는 말랑한 분위기는 아름답지만 더없이 생경한 무엇이었다. 얼어있던 나는 지금도 떠올리면 이불 걷어찰 장면을 연출했다. 민망해서 차마 묘사할 수 없다. 울고 싶었으나 조금 남은 이성이 그것만큼은 안된다며 붙들었다. 주일학교 교사단의 평균연령대가 스물 한둘인데, 교감선생님보다 더 나이 먹은 대학원생이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며 뛰쳐나가면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그래서 둘째 날은 묵묵히 힘쓰는 일만 하기로 마음먹었다. 탁자와 의자를 열심히 들어 나르다 고개를 드니, 지켜보는 얼굴빛들이 안 좋았다. 아무리 “알고 보면 저 천하장사예요”라 주장해도 주위에선 예전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서선생님이 토끼옷 입고 “저 닳을 만큼 닳은 사람이라고요” 했을 때의 이선생님 같은 표정이었다. 옆에 있던 막내교사만 괜히 “지금 저 야윈 누나가 무거운 거 나르시는데 너 뭐하냐?”며 꾸지람 듣고 말이다. 

마침 물놀이용 고무튜브가 모자란다 하여 얼른 빠져나와 강당으로 가지러 갔다. 그곳에서는 신부님 혼자 조그맣게 음악 틀어놓고 저녁 프로그램에 쓸 영상을 편집하고 계셨다. 곡명은 몰랐으나 흘러나오는 노래가 신부님께서 좋아하신다는 이탈리아 아트록 장르임은 알아들었다. 한쪽에서 튜브상자를 느릿느릿 꺼내며 나도 아름다운 선율에 마음을 누였다. 그러다 문득, 언젠가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사제로 살아가며 음악에 대한 선호와 애착을 끊으려 노력하지만 많이 힘들 땐 어쩔 수 없이 찾아듣게 된다는. 신부님은 그렇다면 지금 ‘많이’ 힘드신 걸까? 아이들을 워낙 예뻐하시니 일정이 고되어서는 아닐 테고, 혹시 나로 인해 스트레스 받으셔서인가 싶었다. 봉사의 허울을 쓴 내 어설픈 행동들이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여름캠프 분위기를 망쳤구나.

상자 들고 나오다 미리 봐둔 풀숲으로 들어가 잠깐, 눈물을 쏟았다. 그러자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어떻게든 되겠지 배짱도 솟고 말이다. 그리하여 남은 일정은 그럭저럭 잘 수행한 줄 알았으나, 마지막 날 어떤 영민한 5학년 아이가 귀에 대고 속삭였다. “샘, 그렇게 어색해하지 말고 그냥 다른 샘들 따라하면 돼요.” 끝까지 그렇게 티가 났냐고 나중에 물어보니, 다들 말도 말라 했다. 내 머리 위로 ‘어색, 어색’ 말풍선이 떠다니는 것 같았단다. 

논쟁보다 혼자 읽고 쓰는 게 좋고, 노래방 가기보다 이어폰으로 음악 듣는 걸 즐기고, 단체모임보다 한두 사람과 함께일 때 더 말을 많이 한다. 그러면서 어울리지 않게 늘 ‘함께하는 나’를 꿈꾸었다. 그 소망은 대개 저렇듯 미끄러져 부끄러운 장면들을 만들곤 했다. 그럼에도 이따금 수련원이라 불리는 장소를 방문하거나 우연히 아트록이 귀에 닿을 때면 10여년 전 그날이, 그 오후 강당에 드리우던 햇볕과 웅크리고 자책하던 내 모습이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처럼 펼쳐진다. 부끄러운 기억마저 이럴진대 즐거운 기억은 또 어떨까 싶다. 나중에 생의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골라 사진으로 남긴다는 그 하늘나라 사진관에 가면 한 컷만 고르느라 꽤나 애 먹을 것이다. 수많은 기억들이 손 들고 “저요, 저요!” 할 테니 말이다.

<이소영 | 제주대 교수·사회교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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