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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보여주는 진실 중 하나는 재난이 있는 곳에 재난 유토피아가 탄생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정의가 무너지는 국가적 재난의 순간에 촛불 공동체라는 재난 유토피아가 생겼고 그 공동체는 1600만의 촛불을 불태웠다. 악인들과 사이코패스들의 국정농단으로 인해 국가는 멈추어서고, 관료들, 정치인들은 눈치를 보며 마비되었지만, 역사의 시계를 돌린 주역은 시민이었고, 국가를 재작동시킨 체계는 시민의 촛불명령이었다.

그러나 냉혹한 역사가 전해주는 말에도 귀 기울여야 한다. 국가의 재난을 구해낸 시민 공동체를 파괴하려는 세력들이 이제 반격을 시도할 차례라는 것을. 그리고 그 반격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올 수도 있다는 것을.

11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마지막 촛불집회(20차)가 열리고 있다. 촛불집회는 지난해 10월 29일을 시작으로 매주 주말마다 서울 도심에서 진행됐다. 이준헌 기자

첫째, 관료와 정치인들은 촛불 공동체를 ‘해체’하라고 할 것이다. 재난 시 함께한 이웃들과 시민들 간 연대의 고리를 자를 것이다.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라”고 할 것이다. 이것이 가장 전형적인 수법이다. 둘째, 조속한 ‘정상화’와 ‘질서의 재건’에 협조하라고 할 것이다. 위기 속에서 벌어진 촛불시민 공동체의 일들이 비정상이었던 것처럼 말할 것이다. 마치 위기 전 상황과 똑같은 태도와 자세로 “이제 우리에게 맡겨주세요”라고 할 것이다. 사실 이 위기는 그들이 발생시킨 위기였는데, 어떻게 다시 고스란히 그대로 맡긴단 말인가? 셋째, 이제 머지않아 거세게 명령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제도화’라고 할 것이고, 촛불시민들의 유토피아적 연대는 다시 거세된 학자들과 기회주의적 정치꾼들의 담합으로 대치될 것이다. 숨죽였던 자본세력과 언론세력들은 포섭할 먹잇감들을 드디어 발견할 것이다. 넷째, 이미 짝을 이룬 자본-언론-정치-관료들은 시민들을 분열시켜 피지배의 자리에 배치하려고 들 것이다. 촛불 유토피아를 박제화하고 각 시민들의 공로를 편파적으로 치켜세워 분리해내는 데 성공하려 할 것이다. 일부 시민에 함입하여 우리에게 불신을 주입할 것이다. 다섯째, 자리만 바꾼 관료와 정치인들의 순환은 계속되고 촛불시민혁명은 책이나 기념주화 혹은 누군가의 자서전으로 기어들어가고, 광장은 폐쇄될 것이다.

나오미 클라인이 쓴 <쇼크 독트린>, 레베카 솔닛의 <이 폐허를 응시하라>의 일부를 각색하면 위에 쓴 바대로이다. 적지 않은 재난과 그 뒤의 혁명이 이런 수순을 밟았다. 레베카 솔닛은 경고한다. “과정이 그 자체이고, 끝이었던 재난들도 많다”라고. 즉 진정한 촛불혁명은 촛불이 타오를 때까지로 끝날 위험도 있다는 경고이다. 이 경고음에 대응하기 위하여 우린 이 재난 유토피아를 재발견하고 분석하고 확장해야 한다.

적지 않은 재난 유토피아가 광장에서 시작되어 정권을 바꾸고 새로운 시민사회를 바꾸는 동력이 되어왔다. 변화하지 않을 것만 같았던 권력과 사회가 촛불을 켜고 모이고, 토론하고 행진하는 것을 통해 변화한다는 것을 목격하고 교육받았다. 이 동력을 시민사회의 안으로, 동네와 공동체의 안으로 가지고 들어오는 일이 남았다. 촛불혁명의 지속은 세실 앤드루스가 말했듯이 대규모 광장에서 소규모 마당혁명과 집안에서의 거실혁명으로 이어지면서, 유쾌하고 행복하게 작당하고 모의하는 것으로 이어져야 한다.

다행히 이 치유적 행진은 곳곳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시민학교, 직접 민주주의 서클, 회복적 교육, 비폭력적 실천과 대화 등등 지금 우리의 시민적 각성에 대한 촛불은 확장되고 있다. 세월호 가족 공동체와 그 연대세력은 여전히 굳건하다. 전직 대통령들의 사리사욕과 부패에 대해 근대적 상식을 갖고 있다면 우리는 연대할 일이 풍부하다. 헌법재판소 결정문에 나온 것처럼 진보와 보수의 문제가 아니라 상식과 비상식의 문제이므로. 부도덕하고 무능했던 전 대통령을 전근대적 군주로 모시는 일부 집단에 대한 국민적 안목이 높아지면 다행이리라. 반복되지 말아야 할 국가 재난의 진정한 예방책은 더욱 이타적인 광장, 더욱 연대하는 주민조직, 더욱 신뢰하는 마을공동체가 되도록 하는 일뿐이다. 앤드루스의 말처럼 “행복은 타인으로부터, 연결로부터 온다”.

김현수 | 명지병원 의사·정신건강의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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