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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초 대학입시에 논술이 화두였다. 논술은 객관식인 대학수학능력시험의 한계를 극복하고 수험생의 사고력과 논리력을 측정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지만 일선 교육 현장에 접목이 쉽지 않았다. 당시 서울대 입학관리본부장으로 논술 출제와 채점을 맡았던 김영정 교수(철학과·2009년 작고)가 두 개의 논술 전범(典範)을 제시했다. 하나는 대통령 취임사, 다른 하나는 헌법재판소 판결문이었다. 취임사는 필자(대통령)가 우리 사회의 문제점이나 당면 과제로 의제를 설정한 뒤 그것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형식의 글이다. 독자(시민)의 생각이나 행동을 변화시키기 위해 논리적이면서도 감성적인 전략을 사용한다. 헌재 판결문은 찬반·시비 논란이 있는 사안에 자신의 의견이나 주장을 피력하는 형식이다. 제3자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반대 측의 승복을 받아내려면 증거가 객관적이면서도 논리와 구성이 치밀해야 한다.

지난 10일 오전 헌법재판소에서 이정미 재판관이 낭독한 ‘2016헌나1 대통령 박근혜 탄핵사건에 대한 선고 요지’를 보면서 헌재 판결문이 왜 논술의 전범인지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논리 전개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표현이 적확해 경탄이 절로 나왔다. 글은 재판에 임하는 재판관들의 심경을 밝히는 것으로 시작했다. 이어 대통령 측에서 문제로 제기한 국회의 탄핵소추안 가결 절차와 헌재의 8인 재판관 체제 등은 흠결이 없다고 쾌도난마로 처리하고, 대통령 측과 국회의 주장이 첨예하게 갈린 탄핵 사유 13개를 4개 범주로 묶어 하나하나 따졌다.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나 삼성 뇌물 등은 대통령 탄핵의 유력한 증거가 될 수 있음에도 제외했다. 국회 탄핵안에 포함되지 않은 내용을 넣으면 대통령 측의 반발 등 분란만 일으킬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이정미 헌법재판소 소장 권한대행이 10일 오전 서울시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을 선고하고 있다. 헌법재판소는 대통령 탄핵을 인용했다. 사진공동취재단

헌재의 문장은 간결하고 문체는 건조했다. A4용지 4장, 7000자 분량의 글에 관형어와 부사어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피청구인을 파면함으로써 얻는 헌법이익이 압도적으로 크다고 할 것입니다” 같은 주제문에서 ‘압도적으로’라는 수식어가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독자(청자)에 대한 배려도 돋보였다. ‘지금부터’ ‘먼저’ ‘이제’ 등의 말을 써서 맥락과 내용이 바뀌고 있음을 친절하게 알려주었고, 어려운 한자나 법률용어를 최소화해 법 지식이 없는 일반인도 이해하기 쉽게 했다. 구성이 탄탄해 극적 효과도 뛰어났다. 4번의 ‘그러나’와 3번의 ‘그런데’는 시민들을 일순간에 천당과 지옥으로 내몰며 팽팽한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여론 조사 결과 헌재 선고 전 80% 수준이던 대통령 탄핵 찬성 의견이 헌재 선고 뒤 90% 이상으로 늘어난 것을 보면 그만큼 헌재 판결문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볼 수 있다.

논술의 또 다른 전범인 대통령 취임사(2013년 2월25일)를 찾아서 읽어봤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 국민 개개인의 행복의 크기가 국력의 크기가 되고, 그 국력을 모든 국민이 함께 향유하는 희망의 새 시대를 열겠습니다. … 노후가 불안하지 않고,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이 진정한 축복이 될 때 국민행복시대는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것은 국민 행복의 필수적인 요건입니다. … 깨끗하고 유능한 정부를 반드시 만들어서 국민 여러분의 신뢰를 얻겠습니다. … 저와 정부를 믿고 새로운 미래로 나가는 길에 동참하여 주십시오. 우리 국민 모두가 힘을 합쳐 국민행복, 희망의 새 시대를 만들어 갑시다.”

교과서에 실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대통령인 화자의 권위와 공신력을 바탕으로 청자의 이성과 감성을 흔들어 깨웠다. 직유와 은유, 대조와 대비, 점강과 점층 등 중·고교 국어 시간에 배운 각종 수사법이 활용됐다. 문장이 길어도 운율이 있어 읽는 맛이 느껴졌다.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우리의 역사는 독일의 광산에서, 열사의 중동 사막에서, 밤새 불이 꺼지지 않는 공장과 연구실에서, 그리고 영하 수십 도의 최전방 전선에서 가족과 조국을 위해 헌신하신 위대한 우리 국민이 계셔서 가능했습니다” 등의 표현은 듣는 이의 가슴을 뛰게 하고 눈물샘을 자극했다. 풍부한 예시와 참신한 비유 외에도 ‘경제 민주화’ ‘창조 경제’ ‘문화 융성’ ‘국민 맞춤형 복지’ 같은 창의적 대안이 돋보였다. 그러나 문제는 진실성이다. 세월호 참사에서 드러났듯이 박근혜 정권에서 시민의 생명과 안전은 뒷전이었다. 양극화와 소득 감소로 중장년의 삶은 더 불안해졌고, 다수의 청년에게 결혼과 출산은 사치 혹은 공포가 됐다. 정부는 총체적으로 무능했고, 대통령은 최악의 비리를 저질러 파면당했다. 아무리 문장이 좋아도 내용이 거짓이면 ‘0점’이다. 불행하게도 이를 확인하는 데 4년이 걸렸다.

오창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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