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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해 전 <홀리 모터스>라는 영화가 개봉했을 때다. 평단의 극찬을 받은 작품이라기에 밤늦게 짬을 내어 광화문 근교의 작은 상영관을 찾았다. 영화는 10시 넘어 끝났다.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간 후 출구로 향하던 관객 중 누구도 소리 내어 말하진 않았지만, 얼굴에는 다들 ‘어려워도 너무 어렵다’고 적혀 있었다. 나처럼 혼자 온 사람들은 난해한 대목들을 이해한 척 표정을 꾸몄고, 여럿이 온 이들 가운데 한 명씩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짐작건대 그들이 영화 보자며 일행에게 제안했던 당사자일 테다.

그 시각에 끝난 영화가 한 편뿐이어서 극장을 나선 사람들이 본의 아니게 나란히 걷게 되었다. 사거리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던 중 뒤편에서 볼멘소리가 들렸다. “야, 내가 조낸 이해해보려고 했는데, 아까 네온사인 옷 입고 부비부비하던 거 뭐였냐?” “그게 아방가르드라는 거야.” “무슨 아방가르드가 변태냐?” “그러니까 내가 아이언맨 새로 나온 거 보자고 했어, 안 했어?”

영화<홀리 모터스> 포스터

돌아보니 스물두엇가량 되어 보이는 남자 셋이었다. 친구가 군대 휴가 나와서 함께 극장을 방문한 것일까, 아니면 영화 관련 교양수업에서 교수님이 추천한 것일까. 그중 한 명이 자신 없는 목소리로 “그래도 감독이 퐁네트의 연인들인가, 뭐 그런 존나 유명한 걸 찍었다던데…” 하자 옆의 둘이 “너 또 이런 거 보자고 그러면 진짜!” 하며 헤드록을 건다. 픽, 웃음이 나려 해서 고개를 돌렸더니, 광화문대로의 이순신 장군께서 큰 칼에 손을 대며 ‘어허 이놈들, 바르고 고운 말 사용하지 못할까?’ 호통 치듯 셋을 노려보시는 것 아닌가? 장군의 등 뒤로는 세종대왕께서 어둠 속에 근엄히 좌정하시어 ‘제군들, 퐁네트가 아니라 퐁네프다’라고 정정해주셨다.

횡단보도를 건너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는데 또 두런두런 목소리가 들려온다. “근데 그 장면에서 손은 왜 깨물었냐?” 역시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얼굴이 영심이처럼 동그란 친구와 커다란 뿔테안경 쓴 친구였다. 그녀들도 영화 이야기를 하는 듯했다. “내 말이. 꽃은 왜 먹냐구.” “황당하지 않냐?” “아 진짜. 남주(남자주인공)도 그렇게 생겼을 줄이야.”

그 순간 정류장 저편에서 단호한 목소리가 쨍 울렸다. “그러니까 카락스 감독도 여체를 대상화한 점은 매한가지야. 대단히 폭력적이지.” 담배를 쥔 단발머리 여자가 후배로 추정되는 이들을 세워놓고 한참 영화를 논하고 있었다. 옛 영화잡지 ‘키노’풍의 유려한 문어체 문장들이 구어가 되어 그녀 입술에서 술술 흘러나왔다. 후배들은 엉거주춤 선 채 ‘근데 누나, 목소리 조금만 낮추시지’ 하는 표정이었다. 옆에서 잠자코 듣던 영심이와 뿔테안경이 속삭인다. “야, 영화 얘기 그만 하자.” “우리는 찌그러져 있어야겠다.”

마음에 오래 남는 영화에는 각자의 경험과 시선에 따라 다르게 의미화되는 작품이 있는 반면, 전문가의 비평을 읽어야 비로소 이해되는 작품도 있다. 관람 당시 난 <홀리 모터스>는 후자가 되리라 짐작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영화평에 몰입할 수 없었다. 광인 에피소드에 대한 진지한 정신분석학적 해석을 읽으면 “꽃은 또 왜 먹냐구”가 익살스럽게 겹쳐지고, 모션캡처 배우 에피소드 분석에서는 “네온사인 옷 입고 부비부비”가 귀에 쟁쟁거렸다. 생각 말미엔 큰 칼 쥔 이순신 장군과 그 뒤에 좌정한 세종대왕이 항상 등장했다. 유머코드가 적은 작품인데도 떠올리면 웃음이 났다.

삶과 영화의, 그리고 화면 안과 밖의 경계가 옅어지며 서로 스미는 찰나들이, 잘은 모르지만 작품의 주제 중 하나였을 것이다. 비유와 상징을 다 파악한 듯 표정을 꾸며내려던 내가 등 뒤의 볼멘소리를 들으며 몰래 입꼬리가 씩 올라갔던 순간 또한 안과 밖의 경계가 기워져 짜이는(interwoven) 찰나였을 듯하다. 이순신 장군과 영심이와 “조낸 이해해보려고”와 “여체의 대상화”가 어우러진. 명감독이 만들어낸 영화 속 장면들보다 영화를 본 관객들이 등장하는 광화문 사거리와 종각 버스정류장의 그 장면들이 한층 각별하게 내 안에 각인될 것임을 예감했다. 지금 이곳에서 함께 살아가는 우리임이 즐거웠던 몇 안되는 순간이었다.

<이소영 | 제주대 교수 사회교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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