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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 기온이 30도를 넘어버린 6월의 오후. 그들은 한국철도공사 건물이 보이는 서울역 앞의 천막을 지키고 있었다. ‘부당해고 4000일, 돌아가고 싶습니다’라는 구호가 천막 여기저기에 붙어 있었다. “2015년 대법원 판결을 받았을 때 우리 심정이 그랬어요. 이건 정치적인 판결이다, 어떻게 1, 2심 판결을 모두 뒤집을 수가 있나. 승복이 안되더라고요. 그래도 그땐 생각만 그랬던 거죠. 정말 우리 판결이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었다는 걸 확인하고 나니….”

2015년 7월 대법원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이 양승태 대법원장의 대통령 독대를 앞두고 마련한 ‘현안관련 말씀자료’는 박근혜 대통령의 4대 부문 개혁 중에서도 가장 시급한 문제라 여긴 노동 부문에서 ‘노동 시장의 유연성 확보와 바람직한 노사 관계의 정립을 위해 (사법부가) 노력’한 대표적 판례로 ‘KTX 승무원 사건’을 꼽고 있다. 2015년 2월 대법원은 “KTX 승무원들과 한국철도공사 사이에는 묵시적인 근로계약 관계가 성립하지 않으며 근로자 파견 관계에도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결했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8년6월5일 (출처:경향신문 DB)

KTX 여승무원들이 길고 험난한 법정 싸움에 돌입했을 때 그들이 법에 건 기대는 복직만이 아니었다.

“인정받고 싶었어요. 법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우리가 옳다는 걸. 우리가 떼써서 우리 자리를 찾은 것이 아니라는 걸 법이 확인해주길 바랐어요.”(전 KTX 여승무원 차미선씨)

KTX 여승무원들이 대법원의 선고를 받기까지 걸린 시간은 7년. ‘법의 인정(認定)’을 기다리는 그들에게는 초조한 하루하루였지만, 대법원 판결이란 그런 것이었다.

“대법원 재판은 베일에 가려져 있다. 사건이 대법원에 접수되면 어떻게 처리되는지 언제 판결이 나올지 알기 어렵다. 1년이고 2년이고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권석천 <대법원, 이의 있습니다> 중)

베일 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이 알 도리는 없지만, 이기든 지든 결과가 나왔을 때 승복하는 것은 그것이 민주주의 사회를 지탱하는 약속이기 때문이다. ‘주먹’이 아닌 법에 의한 조정을 시민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판결이 공정했으리라는 최소한의 믿음에 근거한다.

그러나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관련 특별조사단’이 드러낸 사실들은 이 믿음을 송두리째 허무는 것이다.

“판사들은 법정에 들어서는 변호인과 눈조차 마주치지 않으려 애쓴다. 판사의 무심한 눈길 하나라도 법정에 선 사람에게는 ‘혹시 판사가 변호사와 무슨 사적인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의구심을 갖게 만들기 때문이다. 재판의 실체뿐만이 아니라 외관이 중요하다는 것, 밖으로 드러나는 것으로서도 신뢰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건, 판사들이 귀에 못이 박히게 듣는 말이다.”

한 일선 판사는, 판사라면 누구나 아는 바로 그 ‘외관’의 문제 때문에 특별조사단이 밝혀낸 사실들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고 했다.

“검찰수사까지 다 해 보아도 문제가 된 판결들이 실체로는 모두 공정했다고 판명될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건 이미 국민들 앞에 재판의 ‘외관’이 훼손됐다는 것이다. 사법부의 수장이 재판이 거래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 삼권분립이라는 헌법 원리 자체를 부정하고 재판을 최고 권력에 갖다 바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판사의 영혼을 판 것이다.”

명백한 사실은 구구한 해석들을 무력하게 만든다. 이제 국민 누구나 인터넷으로 다 뒤져볼 수 있게 된 대법원의 ‘대외비’ 자료는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라는 장삼이사들의 법의 공정성에 대한 의심이, 법은 결코 만인에게 평등하지 않다는 억울함이, 힘없는 사람들의 근거 없는 피해의식이 아님을 무참하게 확인해준다.

희망의 기초가 되어야 할 법의 공정성에 대한 믿음이 그것을 수호해야 할 직분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무너져내렸다.

우리가 딛고 선 발밑이 꺼져버린 이 소리 없는 거대한 붕괴에 정녕 누가,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정은령 | 언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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