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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교육과학기술부 산하 한국과학재단, 한국학술진흥재단, 그리고 국제과학기술협력재단 세 곳이 한국연구재단(NRF)으로 통합 출범하는 기념식장에 나는 있었다. 과학과 인문사회 전체를 아우르는 거대 국가 연구관리기관이 탄생한 것이다. 그날의 내 머릿속은 수치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기념강연 첫 연사로 나온 한국연구재단 대표는 연구재단 중점사업으로 노벨상 수상자 배출, 세계 순위 100대 대학 2개 이상 만들기, 그리고 인용도 수치가 높은 논문의 양산을 꼽았다. 인문학 지원 축소를 근심하는 많은 청중이 있었지만 한국연구재단 관계자 입에선 이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없었다.

그날로부터 9년의 시간이 흘렀다. 노벨상 수상자와 세계 순위에 드는 대학은 배출되지 않았다. 상위 논문의 수만 늘었을 뿐이었다. 유행에 밀린 연구는 지원이 끊겼다. 기초과학연구원(IBS) 같은 거대 연구비를 거머쥐는 연구자는 기업의 인수·합병처럼 연구자들을 자기 집단으로 빨아들였다. 지금까지의 협업관계는 사라지고 하나의 재벌연구그룹이 탄생하였다. 풀뿌리 연구처럼 곳곳에 씨를 뿌리던 소작인 연구 사업은 사업비가 농장 몇 곳에 집중되는 바람에 황폐화되었다.

한국연구재단은 창의적 연구와 글로벌 인재 양성 지원을 미션으로 정했다. 전략목표로 상위 10%에 드는 논문 수 증대, 인적자원 확대, 연구투자 효율 극대화, 그리고 혁신을 기반으로 한 일자리 창출 5만개를 내세웠다. 인문학을 함께 아우르는 연구재단의 미션에 고독과 자유를 바탕으로 한 지혜와 희망을 전하는 미션이 빠진 것은 극히 유감이다.

5조원 가까운 예산을 운영하는 한국연구재단 운영의 성패는 사실상 민간인으로 구성된 본부장, 단장, 프로그램 매니저(PM)의 전문성과 공정성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독일 연구협회(DFG)의 PM은 내부직원으로만 구성돼 있고, PM이 과제평가를 진행하나 연구비 수혜 최종 결정은 별도의 위원회에서 한다. 공정성을 위해서다. 우리나라 연구재단의 경우 과제평가자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평가자와 지원자의 학연과 지연을 고려하다 보니 공정성이 반드시 전문성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보완해야 할 문제로 남는다.

한국연구재단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연구자들이 존경받는 세상을 만든다는 목표도 좋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사실은 연구재단이 과학적 진보와 인문학적 지혜의 풍요로움을 극대화시킴으로써 궁극적으로 국민의 행복에 이바지할 수 있는 조직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세금 5조원을 운영하는 조직의 당연한 미션이다.

<엄치용 | 한국기초과학지원 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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