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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전쟁위협과 함께 거의 한계점까지 갔던 냉전의 감정(공포·혐오·경멸·증오·우월감)은 불과 4개월 만에 오래된 과거처럼 되고 있다. 북한과 김정은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친근’과 ‘신뢰’로 급반전했다. ‘세습독재’와 세계 최악이라는 인권 문제는 북에 그대로 있고, 참수부대를 만들자던 늙은 남의 냉전 전사들도 여전히 20%의 지지율을 믿고 악을 쓰는데 말이다.

그러니 저 격렬했던 냉전의 감정과 인식이 모두 없어진 것은 아니리라. 여전히 이 사회의 곳곳에 잠재되어 있고, 우리가 앞으로 북녘 사람들과 만나거나 북과 뭔가를 할 때 언제든 쑥 튀어나올 수 있는 어떤 오래된 정신의 기제이다. 그래서 그것을 돌아봐야 한다.

정세의 급변과 거의 같은 속도로 북에 대한 감정과 인식의 대반전이 일어난 것은 아마 역사의 대전환을 기대로써 바라보는 마음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70년 이어져온 휴전 상태와 극우·냉전 기생 세력의 지배를 벗어나서 새로운 나라에서 살고 싶다는 열망 말이다. 이제 남과 북은 새로운 시대를 향해 겨우 한발을 뗐을 뿐이지만, 열망은 ‘냉전 이후’에 대한 장밋빛 상상력과 담론으로 조기 개화하고 있다. 대략 세 갈래로 보인다.

첫째, 탈분단·통일의 전망에 관한 담론. 한동안 거부되거나 잊혔던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 다시 당위로서 쉽게 입에 오르는가 하면, ‘양국체제론’이 통일 당위론과 대립각을 세우기도 한다.

둘째, 북한 사회주의의 전망이나 경제개발에 관한 담론. 북한은 (베트남식) 개혁·개방을 지향한다는 말을 천명한 적 없으나, 남의 담론은 마치 기정사실인 것처럼 하고 있다. 북한체제는 과연 ‘사회주의’로 유지되고 ‘연착륙’할 수 있을지? 북한의 시장화·식민화를 미리 걱정하는 선한 말들도 있고, 북한에서 시민혁명이 일어나면 어떻게 할 거냐는 설레발도 벌써 나와있다.

셋째, 남북한 경제협력과 ‘공동 번영’의 미래상에 대한 담론. ‘발전의 정체에 빠진 남한’과 ‘가난에 찌든 북한’의 상생이 오직 이 길에 있다는 식의 담론은 이전부터 넘쳐났다. ‘한반도 신경제지도’ 구상도 3년 전에 나왔다. 그런데 이 담론들에는 남한이 가진 건 오로지 돈이고 북한은 당연히 남한의 자본을 기다리고 있다는 식의 좀 이상하고 물질주의적인 전제가 강하게 깔려있다. 결국 통일도 화해도 돈이 만드는 것인가?

넷째, 주한미군 철수라든가 한반도의 영세 중립화 같은 한반도와 동북아시아 지정학의 미래에 대한 거대담론이다. 이는 보다 이상주의적이며 역사 전체를 시야에 넣고 있지만 아직 현실성은 부족하다.

이런 담론들과 상상에는 (혼란에 빠진 조선일보나 자유한국당 외에) 좌우가 따로 없지만, 성급하고 농익지 않은 경우가 많다. 미국으로부터 ‘체제 보장’ 받을 북한이 어떤 국가로 변할지, 그들의 전략이 무엇인지 아직 가늠할 수도 없고, 한국전쟁이 끝난 한반도를 살아본 사람도 없다. 따라서 우리는 뭐가 기다리는지 모르는 미지의 미래로 단지 희망을 품고 출발하고 있다. 그래서 통일·탈분단 담론에는 다음과 같은 점들이 더 고려되고 보충되어야 할 듯하다. 차분히 준비하고 남북이 같이 내실을 기르지 않으면 혼란과 환멸이 희망을 걷어찰 것이다.

첫째, 모두가 경제 위주로 북한의 변화에 대해서 당연한 듯 말하지만, 남한 사회에 대한 성찰과 변화의 필요성은 이 담론에서 빠져있다. 공동 번영과 탈분단을 위해 변해야 할 것은 북의 사회뿐 아니라 남의 사회체제다.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 남한 또한 ‘통일’할 경제적·문화적 역량이 없다. ‘피로사회’와 ‘헬조선’을 북녘으로 확장해서는 안된다.

둘째, 통일에 대한 개념적 합의와 과정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그간 담론장에서 ‘과정으로서의 통일’이나 ‘느린 통일’에 대한 합의는 꽤 넓었으나, 현실의 전개는 이를 배반할 수 있다. 또 ‘낮은 단계의 연방제(=국가연합)’가 유효한지, ‘평화체제’로 이행하면 충분한지 재정의와 토론이 필요하다.

셋째, 북한에 대한 진정한 이해나 구체적인 분석에 기반한 담론이 거의 없다. 근본적으로 우리는 북한사회와 체제, 인민의 이해와 요구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 몇몇 전문가나 탈북인들이 제공하는 제한된 지식·정보로는 태부족이다.

요컨대 남과 북의 정치·사회는 이제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상호작용하고 영향을 주고받을 것이며, ‘한반도 수준’의 새로운 문화정치와 이데올로기 문제가 제기될 것이다. 통일을 지향하는 남북의 주민들에게는 서로의 사회를 사회적 민주주의, 민주적 사회주의로 변화시킬 과제가 우선 주어진다. 가보지 않은 길을 안내할 아주 두툼한 가이드북이 필요하다.

<천정환 | 성균관대 교수·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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