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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우체국에서 지갑을 잃어버린 적이 있다. 선물소포를 포장하여 부칠 때만 해도 있었는데 포장봉투를 버린 다음 한참 걷다 보니 아뿔싸, 수중에 지갑이 없었다. 그렇다면 가능성은 두 가지였다. 선반에 두었던 지갑을 누가 훔쳐갔거나 봉투를 버리며 딸려 들어갔거나. 사실 후자의 가능성은 낮았다. 아무려면 쓰레기통에 지갑을 넣을 만큼 정신을 놓고 살진 않을 테니 말이다. 그렇지만 그나마 되찾을 희망이 있는 경우 또한 후자였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커다란 쓰레기통으로 머리를 넣어보니 텅 비어 있었다. 쓰레기통 뚜껑 열고 고개를 들이미는 고객을 본 우체국 직원분이 달려오셨다. 자초지종을 들으신 그분은 십여분 전에 비워진 쓰레기가 이미 지하처리장으로 내려갔다 하셨다. “그럼 어쩔 수 없네요” 하며 돌아서는데 “뭐가 어쩔 수 없어요? 가보면 되지”라며 나더러 따라오라셨다. 지하층으로 내려가니 아까 버린 종이봉투가 저편에 얼핏 보이는 듯했다. 저쪽 같다고 하자 그분은 쓰레기더미 안으로 그야말로 불도저처럼 돌진하셨다. “지갑 무슨 색이에요?” 하시면서. 괜찮다고, 정말 괜찮다며 팔을 잡아끌어 나왔다. 지갑 같은 것은 아무렇지 않아졌다. 비닐 재질로 된 저렴한 물건이었고, 안에 든 돈은 일만 몇 천원이었을 것이다. 요즘처럼 현금을 안 들고 다니는 세태에 남의 지갑 훔칠 만큼 어려운 이라면 내가 작은 도움을 드렸다 치자. 그런 호기로운 마음마저 솟았다.

세상에서 제일 친절한 사람들이 일하는 공간 가운데 하나가 내겐 우체국 같다. 여러 해 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서점에 들렀다 충동적으로 카드를 한 세트 산 나는 선배선생님들께 보낼 연하장을 작성하여 부치러 갔다. 연말이라 우체국에는 사람이 아주 많았다. 직원분 말씀이, 물량이 밀려 일반엽서는 4~5일가량 소요될 거라 하셨다. 그러면 새해일 텐데, “메리 크리스마스”라 쓰인 카드를 연초에 받으면 얼마나 김이 새겠는가? 더 빠른 방법은 없는지 물었더니 특급등기인가 있기는 하다셨다. 무심코 “그걸로 해주시겠어요?” 하자 그분은 손에 쥔 봉투들과 내 얼굴을 번갈아 살피더니 “이거 연하장 아닌가요?” 물으셨다.

특급은 직접전달이 원칙이라 수령인에게 전화가 간단다. 수령지로 기재된 대학들은 현재 방학일 테고 수령인들은 손윗사람일 듯한데, 오히려 받는 분을 번거롭게 해드리는 결례를 범하지 않겠냐 하셨다. 연하장은 본디 늦게 받아도 기분 좋은 법이라며 일반우편으로 보낼 것을 권하셨다. “네? 네…” 하며 엉겁결에 그렇게 했다. 그리고 두고두고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사실 그분이야 안에 든 것이 연하장이든 업무서류든 알 바 아니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밀려들어 정신없던 와중에 수령지와 고객의 표정에서 그것이 ‘긴급하지 않음’을 유추하셨던 따스한 관심과, 우편매너에 무지한 사회초년생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도록 조언해준 배려에 감사했다.

왜 우체국에서는 항상 좋은 분들을 만날까. 문득 궁금해졌다. 한국우정사업본부는 구글처럼 꿈의 기업이란 말인가. 그런데 떠올려보면 해외에 있을 때도 그랬다. 지구 건너편에서 공부할 무렵, 지인에게 부칠 소포꾸러미를 품에 안고 있었더니 할아버지 직원분께서 “왜, 너도 그 소포와 함께 바다 건너 날아가려고?” 농담을 던지셨다. 그리고 이어서 “너의 그 웃음이 참 좋다. 넌 앞으로도 항상 그렇게 웃으며 살아라, 알았지?” 하셨다. 웃음이 예쁘다는 칭찬은 그때 처음 들었다.

내가 우체국에서 ‘먹어주는’ 얼굴인 건가 하며 친구들과 농담을 주고받다 생각하니, 그곳에 갈 때면 나는 언제나 웃고 있었던 듯하다. 내 엽서나 선물꾸러미를 받게 될 상대방의 놀라움과 즐거움을 상상하며 표정이 아이스크림을 갓 꺼내든 아이처럼 환했을 것이다. 우체국에서 상냥한 이들만 만났던 것은 그분들이 실제로 친절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로는 선물 보내는 순간의 설렘이 그분들께 전해져서일지도 모르겠다.

새해 우리 앞에 놓일 하루하루를 우체국 찾아갈 때의 얼굴로 맞이하면, 연말 즈음 우리는 저마다 ‘웃음이 예쁜 얼굴’에 조금 더 가까워져 있지 않을까.

<이소영 | 제주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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