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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을 때 나는 일 중독에 가까운 타입이었다. 심지어 뭔가를 먹는 시간도 아까운 경우가 많았다. 내 주위에는 프로젝트를 끝내는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은 오로지 주문한 음식을 배달받을 때뿐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때로는 그 시간조차 아까워 며칠 것을 한꺼번에 주문한다고 해서 나보다 더한 사람도 있구나 싶기도 했다. 그렇다 보니 나는 ‘맛집’ 순례를 다닌다는 사람들을 선뜻 이해하기도 어려웠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외할머니에 대한 그들의 추억에 관해 듣게 되었다. 아이들은 어릴 때 외할머니께서 해주시던 맛있는 음식이 지금도 가장 그립다고 해서 나를 놀라게(?) 했다. 그 후 이러다가 나중에 아이들이 나에 대해 추억할 거라고는 라면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뒤늦게 요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면서 새삼 음식이 인간관계에 미치는 영향력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맛있는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으면서 화를 내기는 정말 어렵다. 얼마 전 한 지인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그가 하는 일 중 하나가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모아놓고 합의점을 찾는 것인데 그게 쉽지 않다고 했다. 다들 자기네가 옳다고 서로 으르렁거리기 때문이라고. 고민 끝에 지인은 일단 그들을 소문난 맛집으로 데려가기로 했다. 그런데 맛있는 음식들이 앞에 놓이자 정말 분위기가 많이 누그러지면서 비로소 대화에도 진척이 생기기 시작하더라는 것이었다.
언젠가 지인의 초대로 정갈한 음식을 만드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그의 음식을 먹으며 정말 음식이 살아 숨쉰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내 생각을 표현했더니 그가 자신의 요리철학을 들려주었다. 그는 음식을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로 신선한 제철 재료, 간, 온도 그리고 음식을 먹는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을 꼽았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네 가지가 음식을 만들 때만 필요할까 싶었다. 삶이나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다만 온도에 있어서만은 음식의 온도와 인간관계의 온도가 조금 다를 뿐. 흔히 음식은 ‘불맛’이라고 하는 것처럼, 뜨거운 음식은 뜨겁게, 찬 음식은 차게 먹어야 제 맛이 난다. 하지만 인간관계에서는 뜨거울 때와 차가울 때가 너무 극명하면 문제가 생겨난다. 분노로 뜨겁다가 냉정함으로 차가워지는 것을 반복하다 보면 소비되는 에너지가 너무 많다. 요즘 날씨가 추워 보일러를 틀 때 집 안 온도를 늘 일정하게 맞추어 놓는 것이 에너지 손실이 가장 적다고 한다. 그런 것처럼 마음도 인간관계도 일정하게 적절한 온도를 유지할 때 우리는 에너지 손실을 그만큼 줄일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인간관계가 그처럼 적절하게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는 관계일까? 아마도 오랜 친구와의 우정이 아닐까 싶다. 사실 정신의학적으로 연애는 스트레스에 해당한다. 일단 연애는 불에 데일 듯이 뜨겁기는 하지만 불안하다. 아무리 서로 사랑하는 사이일지라도 과연 상대방이 내가 원하는 순간에 원하는 만큼 나를 사랑해줄까 하는 의구심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것이 연애다. 어느 작가의 표현처럼 ‘부디 내가 아닌 그가 나를 더 사랑하게 해주소서’ 하고 기도하게 되는 것이 연인의 마음이기도 하다. 어찌 하루하루가 스트레스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오랜 우정에는 그런 스트레스가 없다. 맛으로 치면 언제 먹어도 질리지 않는 담백한 맛에 해당한다. 무엇보다 그런 친구와의 관계에는 언제 만나도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줄 것이라는 신뢰가 있다. 따라서 편안하다. 그리고 힘든 일이 있을 때 친구는 서슴없이 손을 내밀며 우리 힘을 합쳐서 이 곤경에서 벗어나 앞으로 나아가자는 희망을 준다. 즉, 깊은 우정에는 신뢰와 평안함 그리고 희망이 함께한다. 덕분에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게 일정한 온도를 적절하게 유지해 나간다. 한마디로 에너지 손실도 가장 적은 관계인 것이다. 물론 그런 우정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이나 인간관계에서 무엇보다도 ‘항상심(恒常心)’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이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력한다면 반드시 그 보답이 따르는 것이기도 하다.
<양창순 | 정신과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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