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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권 국가의 어느 영문과 교수가 동료들과 ‘당연히 읽었을 것 같은 책 중에 읽지 않은 책’을 고백하는 게임을 했다는 우스갯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교수는 게임을 이기려는 욕심에 <햄릿>을 안 읽었다고 솔직히 말했고, 결국 학교에서 쫓겨났다고 한다. 읽지 못했다는 죄의식의 먼지가 두껍게 쌓인 목록이 누구에게나 있다. 나도 제법 긴 목록을 가지고 있는데, <안나 카레니나> <전쟁과 평화> 같은 러시아 책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가끔 ‘이 책들을 끝내 못 읽고 죽는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이 다가올 때면, ‘가진 것이 시간밖에 없는 늘그막에 읽으면 되지’ 하고 스스로 위안한다. 지난해 말에 문득 <닥터 지바고> 또한 20대에 영화로 본 적은 있으나, 책으로는 읽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했다.

며칠 후, 주말이면 찾아가는 도서관에서 책장이 너덜너덜한 책을 빌렸다. 조금씩 며칠간 읽다보니, 인상적인 몇 장면과 유명한 주제곡 외에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 영화도 다시 보고 싶어졌다. 2018년이 저물어가는 어느 휴일 이른 새벽에, 거실 TV로 혼자 영화를 보았다. 무수한 사람들이 언급한 이 영화에 관해 무슨 말을 덧붙일 수 있을까.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지바고는 낡은 체제에 대한 분노와 정의의 요청에 공감하지만, 혁명에 수반되는 비인간적 과정과 어쩐지 어긋난다. 혁명의 현실은 인간의 본성과 덜그럭거리고, 심지어 또 다른 압제가 되어 개인의 자유와 내면세계를 짓누른다. 그는 어떤 길을 걸어가야 하는가. 3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이 끝나고도 아직 동이 트지 않는 아침에, 나는 러시아 혁명이라는 장대한 파도에 출렁거린 한 진실한 인간을 생각하며 다시 잠을 청한다. 하지만 쉬이 잠들지 못한다.

이 영화를 젊어서 처음 만났을 때에는 메시지를 피상적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그사이 나이를 헛먹지 않았는지, 나는 지바고를 비롯한 등장인물들이 마주한 현실과 그들의 선택을 마치 가까운 지인의 일처럼 느꼈다. 혁명가와 구체제 인물 그리고 시대에 적응해가는 영리한 현실주의자, 그사이에서 고뇌하는 섬세한 지식인은 매우 전형적인 설정일 수 있다. 그러나 삶의 길과 죽음의 골짜기가 수시로 갈라지는 혁명적 순간의 인간들을 유형화하자면, 달리 어떻게 할 것인가. 처음 영화를 보고나서 20년 이상 흘렀고, 그사이 인생에서 마주친 많은 인물과 사건들은 일종의 직관적 빅데이터가 되어 내 마음에 쌓여 있다. 이제는 굳이 유형을 나누어 이해하려 애쓰지 않아도, 인간 군상들이 만들어지고 살아가는 몸짓들, 그들이 시간에 따라 무너지고 변해가는 모습들을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다. 위대한 개혁의 초췌한 뒷모습과 피끓는 정치의 온갖 협잡은 또 어떠한가. 그토록 많은 혁명적 구호들이 쓰레기통에 처박혔고, 거인처럼 보였던 인물들은 시간이라는 빙하에 서서히 침식되어 사라졌다. 

한반도에서 20세기 전반부를 젊은이로 살아간 사람 중에는 지바고 못지않게 난폭한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사람들이 많았다. 20세기 뒷부분을 젊은이로 살아간 우리 세대는 예외적인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그보다 덜 무시무시한 시대를 통과했다. 우리들이 선택한 사상과 행로가 생사를 가른 경우는 드물었다. 그러나 엇갈리는 여러 선택은 다양한 운명의 물줄기가 되어 흘러갔다. 어느 물줄기는 탁 트인 바다에 이르기도 하고, 아름다운 호수를 이루기도 했다. 그러나, 물이 말라 사라지거나, 기껏해야 웅덩이로 남은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아직 진행 중인 그 세대의 선택들, 마주했거나 회피했던 일들의 결산보고서는 머지않아 아파트 1층 세대별 우편함에 도착할 것이다.

나는 끝내 잠을 이루지 못해 다시 일어난다. 가을에 이사한 아파트의 창문 너머로 멀리 보이는 남산의 한 자락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스산한 겨울의 남산이 조금씩 밝아진다. 나는 삶과 역사에 대한 두려움을 잊어가는 안전한 중산층의 눈높이로 계속 남산을 바라본다. 복잡한 마음 한편으로 해가 뜬다.

나는 혁명의 와중에 의사로 일하던 지바고, 권력자에게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총을 쏘는 젊은 라라, 라라와 재회하던 지바고, 딸을 잃어버린 지바고를 생각한다. 그리고 라라를 마지막으로 발견하고 따라가다가, 거리에서 병으로 쓰러지는 지바고를 떠올린다.

저마다의 생이 만나는 시대가 있어, 상상을 초월하는 불운을 겪기도 하고 오솔길을 걷기도 한다. 나는 제 딴에는 힘겨웠으나, 시인이었던 의사의 험로에 비해 주말의 산책과 같았던 내 삶을 생각한다. 식어가는 피를 잉크 삼아 글을 남긴 보스테르나크의 냉동된 시간에 비해, 만년설을 눈요기하며 걷는 트레킹과 같았던 내 시간을 회상한다. 주어진 소임을 얼마나 해낸 것일까. 보잘것없지만 부끄러울 만큼은 아니라 생각했다. 그런데 영화를 다시 보고나니, 해낸 것이 거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닫는다.

무언가 회피했거나 스스로에게 속은 것이 있다면 우리에게 아직 기회가 남아 있을까. 검색창에 ‘닥터 지바고’라고 치면, ‘TV 주치의 닥터 지바고의 다이어트 방법’이 모니터를 채우는 이 아이러니한 시대에, 무언가 해낼 방법이 남아 있기는 한 것일까. 아니면, 우리 세대가 가능성을 연 것만큼이나 많은 가능성을 닫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빨리 떠나야 하는 것일까.

‘읽었을 것 같지만 읽지 않은 책’의 목록에 하나씩 줄을 긋는 것으로 소일하는 어느 날엔가, 나는 살아온 세월을 한 번쯤 총괄하게 될 것이다. 그때에 나는 생을 슬쩍 비켜갔다는 ‘돌이킬 수 없는 후회’에 사로잡힐 것인가. 아니면 무사했던 삶에 안도하며, 설원의 썰매가 아닌 자율주행차를 타고 강바람이라도 쐬러 갈 것인가.

<조광희 |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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