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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의 대학입학시험은 학력고사였다. 선 지원이었고, 전기, 후기, 전문대 각각 따로 원서를 쓰고, 따로 시험을 봐야 했다. 전기대 입시는 지원한 대학교에서 있었다. 택시 운전을 하는 아버지가 택시로 교문까지 데려다주었다. 나는 도시락을 가져가지 않았다. 긴장을 하면 소화가 안되니 먹을 것 같지도 않았다. 점심시간에 나를 받아줄지 거절할지 알 수 없는 교정에 앉아 같이 시험을 보는 친구가 나눠주는 초콜릿 한 조각을 점심 대신 먹었다. 예외 없이 입시한파가 몰아친 날이었을 텐데, 거짓말처럼 환하던 햇빛만 기억난다. 시험이 끝나고 터벅터벅 교문을 걸어 나가는데, 익숙한 얼굴이 웃으면서 나를 불렀다. 아버지였다. 만나자는 약속도, 기다리겠다는 약속도 없었다. 그래도 우리는 그곳에서 우연처럼 만났다. 그 많은 수험생과 그 많은 학부모들과 그 넓은 대학 캠퍼스의 교문 앞에서 어긋나지도 않고 엇갈리지도 않고 나중에 생각하니 신기했다. 휴대폰은커녕 호출기도 없던 시절이었다. 아버지는 그 앞에 언제부터 서 있던 것일까. 시험은 어려웠고, 고사장을 빠져나오는 내 미래는 비관으로 가득했지만 교문 앞에 서 있던 아버지를 보는 순간 그 모든 걱정이 사라졌다. 날마다 보는 아버지가 그때보다 더 반가웠던 적이 있을까.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고등학교 앞에서 15일 오전 한 어머니가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르는 아들을 시험장에 들여보낸 뒤 기도를 하고 있다. 김기남 기자

지난주에는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있었다. 올해도 변함없이 적잖은 학부모들이 교문 앞에서 떠나지 못하고 기도도 하고, 응원도 보냈다. 그리고 그 모습으로 예외 없이 비판을 받았다. 소위 극성 맘들이 자식에 대한 지나친 기대로 보이는 과잉 사랑이라는 것. 비판을 하는 사람들은 그곳을 떠나지 못하는 이들이 교문에 서서 기도하면 애들이 시험을 잘 볼 거라고 믿는 미신에 사로잡혀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런 사람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이건 전쟁, 이라고 누구나 공감하는 입시현장에 아이 혼자 들여보내고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머뭇거리다 보니 시험이 끝날 때까지 서성이게 된 마음 약한 부모도 있을 것이고. 신기한 건 그 하루 교문을 떠나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른 부모는 극성으로 비판받았는데, 수능 100일 전부터 보낸 응원의 편지가 담긴 한 수험생의 통장은 감동적인 부모의 사랑으로 내내 회자되었다. 그 두 종류의 사랑은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 시간의 차이일까, 방법의 차이일까.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사랑은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적당하고 바람직할까. 아이를 기르면서 나는 그 균형점이 늘 헷갈린다. 품에 안으면 과잉이라 비판받고, 내버려두면 방치 혹은 학대로 비난받는다. 제일 어려운 건 아이가 실패했을 때, 그 실패를 껴안아주는 방법인 것 같다.

시험이 끝나고 나를 마중 나온 아버지에게 매운 냉면을 사달라고 했는데, 냉면을 파는 집은 족발집뿐이었다. 그마저도 차가운 물냉면만 팔았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집에서 족발도 먹고, 차가운 물냉면도 먹었다. TV에서는 그날 치른 시험 정답이 발표되는 중이었는데, 우리는 그 내용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대신 기억나지 않는 다른 이야기만 주고받았다.

나는 그 시험에서 실패했다. 후기대 입시는 혼자서 갔다. 내가 그러겠다고 했다. 실기시험을 보는 날은 폭설까지 내려서 찾아가는 일이 곤혹스러웠다. 지하철을 타고 버스로 갈아타야 했는데, 버스가 다니지 않았다. 겨우 잡은 택시는 언덕을 넘지 못해서 나는 중간에서 내려 30분을 넘게 걸어 종이 울리기 직전에야 겨우 입실할 수 있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거기서부터는 내 몫이고 내가 혼자 가야 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눈길을 걱정했지만 아버지도 내 결정을 말리지 않았다.

부모가 되고 보니 모든 부모의 사랑을 굳이 재단해서 구분하고 싶지 않다. 어떤 사랑이 옳고 어떤 사랑이 그르든, 어떤 사랑 아래 있든, 결국은 저 홀로 살아간다. 혼자 알아서 하라고 내버려둔다고 강해지는 것도 아니고, 이것저것 다 챙겨준다고 응석받이가 되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어떤 사랑이든 부모가 자식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사랑은 홀로 나선 길을 바라보는 용기가 아닐까 싶다. 지금 그 길 앞에 서 있는 아이들과 부모 모두에게 그 용기가 함께했으면 좋겠다.

<한지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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