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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잡지 ‘에피’ 겨울호의 한 부분을 수능 수학과 수능 과학의 리뷰를 싣기로 정한 것은 여러 달 전이었다. 벡터와 기하를 수능 범위에서 제외하는 문제를 두고 수학과 과학계가 반발하면서 수능에서 어떤 범위를 다루는 것이 좋은지를 두고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졌던 설전을 정리하고 싶었다. 당시에 수능 수학의 범위를 축소하는 것과 관련해서 인공지능이 수학의 어떤 범위를 대체할 수 있는 상황에서 전공자도 아닌데, 어려운 문제를 두고 씨름을 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도 있었다. 나는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셈을 할 줄 알고 계산기를 두드리는 것과 셈을 못하면서 계산기를 두드리는 것 사이에는 깨닫고 얻을 수 있는 것의 차이가 확연하다. 셈을 모르면 응용은 꿈도 꿀 수 없다. 계산기, 혹은 인공지능의 아바타로 살 것을 바라지 않는다면 다가올 미래에 수학이나 과학에 인간이 시간을 덜 쏟아도 된다는 주장에는 근거가 없다. 수능 문제에 대한 전문가들의 평가를 통해서 이런 논란을 돌아보고 싶었다.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 수능 문제에 대한 리뷰를 청탁하는 것은 순조로웠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진중한 과학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물리학자부터 해외 대학에서 오래도록 연구와 교육을 하고 있는 생물학자까지 다양한 배경을 가진 전공자들에게 부탁을 했다. 언어영역에 나온 과학 지문에 대한 관심이 높아서 급하게 이것에 대한 리뷰도 싣기로 했다. 모두 바쁜 와중에 재미있는 기획이라며 기꺼이 청탁에 응해 주었다. 직접 수능 문제를 풀어보고 그 문제들을 전공자의 입장에서 수준을 가늠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앞으로 전공할 학생들, 혹은 앞으로 전공하지 않을 학생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지 평가를 해 주기를 원했다. 그런데 정작 이 기획을 시작하게 만들었던 수학 분야에서는 아무도 청탁을 받아주지 않았다. 20여 분의 수학 전공자들에게 퇴짜를 맞았다. 서울, 대전, 광주, 부산, 창원, 포항 등 전국 각지에 수소문했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낭패였다. 수능 수학문제를 둘러싼 논쟁에서 시작했지만 주변의 몇몇 에피소드 덕분에 호기심은 더 커진 터였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저명한 물리학자가 수능 수학문제를 다 풀지 못하고 100점 만점으로 치면 75점쯤을 받았다고 했다. 그분의 실력을 익히 알기에 깜짝 놀랐다. 또 다른 자리에서 내 또래의 유명한 물리학자가 수능 수학의 마지막 문제를 몇 시간 동안 끙끙대다 결국 풀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분들은 고등학교에서 모두 수학 영재, 혹은 천재 소리를 들었던 분들일 것이고 아직도 수학을 많이 사용하는 물리학을 밥벌이로 하고 있는데 도대체 어떤 문제들이 이분들을 좌절하게 만들었을지 궁금했다. 그래서 수학 전공자의 육성으로 수능 수학문제에 대한 솔직한 심정을 듣고 싶었다. 헉생들이 이렇게 어려운 문제를 풀어야 하는 이유는? 교육적 효과는? 사회적인 의미는?

그런데 모두에게 거절당했다. 물론, 고작 20명에게 부탁을 해 본 것이니 단지 운이 나빴던 것일 수도 있다. 수학도 분야가 넓고 전공은 세분화되어 있어서, 전공자들이라도 수능 문제를 풀어보는 것이 부담이 되었을 수도 있다. 전공자들조차 푸는 것에 거북함을 느끼는 문제들을 학생들은 왜 풀어야 할까? 또 다른 가능성은 정치적인 공방에 휩쓸리기 싫어하는 수학자들의 생리가 작동했을 수도 있다. 올해처럼 불 수능, 마그마 수능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기대와 다른 점수를 맞은 학생들이 너무 많아서 재수생을 양산할 가능성이 높으면 수능 문제를 두고 구설이 심할 터이니 거기에 휩쓸리고 싶지 않았으리라. 상황이 이러면 말 한마디 한마디가 정치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커진다. 그래도 이런 문제가 수학 분야만의 문제가 아닐 텐데 용기 있는 필자를 만나지 못해서 아쉽다. 개별적인 사정들이 없지 않았겠으나 모두가 입을 다문 상황은 수능 수학문제를 둘러싸고 해야 할 말이 많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수능 수학이 아이들을 점수로 줄세우는 것이 목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사교육을 방지하겠다고 학교 범위 안에서 어렵게 내는 모양인데 수학적 직관이나 자질보다는 반복훈련으로 비비 꼰 함정을 피하는 것만 연습하는 데 학원만 한 곳이 없다. 청탁에 실패해서 섣불리 판단하기 어려우나 수능 문제가 학생들의 실력을 향상시키거나 수학 교육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없다. 고등학교 과정을 정상적으로 이수한 것만으로는 풀기 어렵고 사교육의 단련을 열심히 받아야 함정을 피할 수 있는 수능 수학문제의 정체를 누군가 나서 속시원히 밝혀주시길 간절히 바란다.

<주일우 | 이음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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