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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람이 언제부터 불어온 것인지는 모르겠다. 태풍이었을까. 학교 수업 중이었는데 순식간에 창밖이 어두워지더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하늘을 가르는 번개와 세상을 찢는 천둥소리. 어쩌면 오늘이 세상의 끝인지도 몰라. 놀란 몇몇 아이들이 울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때 열 살 무렵의 아이들이었다. 할아버지 같았던 나이 많은 담임 선생님이 아이들을 달래려고 애썼지만 그다지 효과는 없었다. 한참을 울다보니 수업이 끝났다. 여전히 사방은 캄캄했다. 집에 갈 용기가 없어 아이들은 학교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창문에 쪼르르 매달려 있었다. 아, 저걸 보아. 아이들 가운데 누군가 운동장 한끝을 가리켰다. 그곳에 서 있던 나무 한 그루, 우리 학교에서 가장 우람하고 커다랗던 나무가 뿌리까지 뽑혀 쓰러져 있었다. 그걸 본 순간 두려움이었는지 경이였는지는 모를 어떤 감정이 솟구쳐 울고 싶어졌는데 무엇보다도 그 거대한 것이 쓰러질 수 있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는 그 나무가 떠오른다.

제19호태풍 '솔릭'이 북상하고 있는 21일 오전 부산 동구 부산항 5부두(관공선부두)에 수백여 척의 선박이 대피해 있다. 기상청은 태풍 '솔릭'이 23일 오전 9시께 전남 목포 남서쪽 120㎞ 부근 해상을 통과할 것으로 예상했다. 연합뉴스

바람 한가운데 있는 것처럼 내내 흔들리고 어지러운 시간들이 지나가고 있다. 안희정 전 지사의 무죄 판결문도 이해할 수 없고, 재벌 위주 규제완화의 폐해를 그렇게 반대해온 이들이 새삼 규제완화로 성장을 주도하겠다는 말도 납득이 되지 않는다. 내국인 대상 카지노 설립 허용은 지하경제 활성화와 대체 얼마나 다른 말인 건가. 무엇보다도 나는 옥탑방 한달 체험 끝에 강북 개발의 당위성을 확신한 서울시장의 인터뷰 기사가 이해되지 않는다. “교통, 도로, 주거, 교육 인프라 개발로 서민 삶의 질을 높이면 청년과 신혼부부가 들어오게 되어 있다”는 말을 몇 번이나 곱씹어 생각한다.

‘제5차 성차별·성폭력 끝장집회’ 참가자들이 18일 서울역사박물관 앞에서 안희정 전 충남지사에 대한 무죄판결을 규탄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전현진 기자

단순히 낙후된 삶을 개선하겠다는 의미의 개발이 아닌 전면 개발이다. 그의 계획대로 개발된 도시는 개선된 주거환경과 높은 삶의 질을 담보할지 모르지만, 그가 말한 청년과 신혼부부 중 그 비용을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이들은 과연 얼마나 될까. 그래서일까 어느 인터뷰에서는 강남에 사는 이들이 강북으로 이사 올 것이다, 라고도 했다. 그렇다면 강북에 살던 이들은 어디로 가야 할까. 나는 ‘들어온다’는 표현이 계속 눈에 거슬린다. 그 말은 구역을, 경계를 내포하는 말이 아니던가. 노인과 저소득층도 그렇게 개선된 사회 어딘가에 편안하게 자기 주거를 보장받을 수 있을까. 한 달 동안 그이는 옥탑방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한 달 만에 내려와 강북을 강남처럼 개발하겠다는 인터뷰를 찾아 읽고 있자니 <옥수동에 서면 압구정동이 보인다>는 어떤 극의 제목이 저절로 떠오른다. 옥탑방 대신 반지하에 살았으면 차라리 낮은 자리에서 살 수밖에 없는 이들의 삶이 보였을까.

“서는 데가 달라지면 풍경도 달라지는 거야.” 몇 년 전 드라마로도 제작되어 화제가 되었던 웹툰에 나온 말이다. 서 있는 자리가 다르면 풍경이 달라진다고 했지만 그러나 같은 자리에 서 있다고 같은 풍경을 보게 되는 건 아니다. 그곳이 끝인 사람이 있고, 그곳이 시작인 사람도 있다. 그곳이 최선인 사람도 있고, 그곳이 바닥인 사람도 있다. 풍경은 밖에 있어도 풍경에 대한 자각은 마음에서 한다. 똑같이 가난한 집에서 자수성가를 해도, 어떤 사람은 지난 시절의 가난한 이웃을 살피고, 어떤 사람은 가난 따위 돌아보지 않는 성공을 꿈꾼다.

어떤 삶이 체험으로 이해 가능하다면 그것은 그 삶에 대한 모독일 것이다. 경험만으로 지식을 쌓을 수 없고, 체험으로 삶을 살 수 없다. 그렇더라도 때로는 그런 노력이라도 필요할 때가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 경험이, 체험이 공감이나 인식의 전환을 위해서가 아닌 자기 계획, 자기 논리의 알리바이를 위해서 쓰인다면 그것은 외면보다 더한 무례일 것이다.

태풍이 올라오고 있다. 어마어마한 위력으로 한반도를 관통할지도 모른다고 한다. 이 바람에 또 무엇이 쓰러질까. 어려서 본 운동장의 나무는 내게 두고두고 숙제로 남았다. 결코 쓰러지지 않을 것 같던, 그러나 기어이 쓰러진 그 나무가 우리를 위협하는 그 무엇을 의미했으면 좋겠는데, 우리가 끝내 지키고 싶은 다른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봐 나는 불안하고 또 불안하다.

<한지혜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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