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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스한 남녘 바람이 살랑대며 봄을 실어 나르고 있다. 잦은 황사 때문에 예전만은 못하지만 꽃과 햇살이 어우러진 이 땅의 봄은 여전히 아름답다. 여인들의 화사한 옷차림이 거리를 물들이고 주말이면 상춘객들이 근교의 등산로를 가득 채운다. 울긋불긋한 모자와 등산복들이 어우러져 마치 거대한 화훼농장이 산길을 따라 이동하는 것만 같다. 그러나 봄을 맞이하는 심사가 마냥 즐거울 수 없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봄이면 으레 몇 번씩 접하게 되는 엘리엇의 시 ‘황무지’가 노래하듯이 봄은 잔인한 계절이다. ‘4월은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기억과 욕망을 뒤섞고 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든다. 차라리 겨울에 우리는 따뜻했다. 망각의 눈이 대지를 덮고 마른 구근으로 가냘픈 생명만 유지했으니….’ 수년 전 작고한 영문학자 장영희 교수는 이 시가 ‘계절의 순환 속에서 다시 봄이 되어 버거운 삶의 세계로 돌아와야 하는 모든 생명체의 고뇌를 묘사하고 있다’고 해석했다. 차라리 겨울이, 죽어있을 때가 따뜻했다는 말인가? 봄비로 잠든 뿌리를 흔들어 생명을 일깨워야 하는 고통이라니….

우리는 다시 4·3 제주항쟁과 4·16 세월호 참사, 4·19 민주혁명, 5·16 쿠데타, 5·18 광주민주항쟁 등을 맞이해야 한다. 수많은, 비장한, 그리고 처참한 기념일들의 행렬은 우리의 봄이 아직은 결코 따스할 수 없다는 진실을 잔인하게 시위한다. 우리는 사실 아직까지 온전한 진실을 충분히 밝혀내지 못했고 혹독한 가해자들을 제대로 처벌하지도 못했으며, 그래서 희생자들을 위한 해원도 하지 못했고 과거와의 화해도 할 수 없었다. 차라리 ‘망각의 눈이 대지를 덮고 마른 구근으로 가냘픈 생명만 유지했던’ 지난 겨울이 더 따뜻하게까지 느껴지는 이유이다. 이 처참한 기념일들이 상징하는 황무지를 딛고 일어서서 다시 꽃을 피우려면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주한 미국대사관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던 민변 회원이 경찰에게 저지 당하고 있다._연합뉴스

최근의 현실은 우리가 진정한 봄을 맞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드 배치 문제로 분단된 남북관계는 최악의 위기에 봉착했으며, 정부는 테러방지법을 앞세워 국민감시체제를 구축하고 있고 야당은 야당대로 총선을 코앞에 두고 분열의 길을 태연하게 걸어가고 있다. 대화 부재의 분단논리, 절대적 감시와 통제, 정파간 대립과 분열이 판을 치고 있는 것이 오늘 이 땅의 현실인 것이다.

올 봄 다시 맞이하게 될 수많은 기념일들 사이에 4·13 총선이 우뚝 서 있다. 늦었지만 청년들을 비롯한 여러 신진세력이 이번 총선을 계기로 정치에 참여한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이들의 새로운 도전에서 희망을 읽고 싶다. 그리고 이들이 척박한 황무지에 봄을 불러오는 진정한 남녘바람들이 되기를 기원한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 앞에서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뼛속까지 바꾸는 혁신이라고 이야기한다. 흑백의 분단논리, 일방적 감시와 통제, 대립과 분열을 완전히 털어내는 과정이 필요하다. 우리는 강대국 사이에서 짓눌리고 핍박받는 과정에서 중립(中立)의 이상을 꿈꿔왔으며, 국민감시체제를 휘두른 군부독재가 비참한 말로를 맞이하는 것을 지켜보았고, 정파간 파벌싸움에 세월 가는 줄 모르다가 선거에 대패하는 역사를 반복적으로 목도했다,

그런데 어느새 이런 것들을 모두 잊어버린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 때마저 있다. 모두가 변화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무엇보다도 나의 내면에 숨어있는 분단지향의 속성, 나의 속에 웅크리고 있는 독재와 식민지 지향의 근성, 파벌 근성 이런 것들을 부릅뜬 눈으로 응시하고 도려내지 않으면 변화는 불가능하다.

왜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지 참담한 현실에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품지만, 변화는 내면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들어 생명의 새싹을 일깨워내기 위해서는 처연한 상처와 아픈 가슴들을 척박한 대지에 뿌리내려 우리 스스로 봄을 불러들여야 한다.


신좌섭 | 서울대 의대 교수·의학교육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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