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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베로나에서 태어나다.
노래 잘하고, 오페라 좋아하는 삼촌 덕분에 싸구려 자리일망정 음악회는 놓치지 않는 어린 시절을 보내다.

실업 학교 학생 때 아레나디베로나 극장에 견습 나갔다가, 학교 마치고는 정식으로 극장에 취직하다. 취직해 아레나디디베로나 극장의 의상실 또는 영선실 일꾼으로 살다.
극장 일꾼이므로 극장의 리허설, 드레스리허설을 얼마든지 보며 살다. 거의
매일 모차르트, 베르디, 푸치니, 벨리니, 레온카발로, 차이콥스키, 무소르그스키의 드라마를 보고 듣다. 본공연보다... 역시 '리허설이 짱!'이라 여기다.
점심은 언제나 샌드위치와 차 한 잔이 전부. 가다, 잠깐 쉬는 틈에 재봉틀질을 멈추고(또는 무대의 나무 마루 깁느라 하던 망치질을 멈추고) 낙서하듯 악보를 그리다.
그러던 어느 날 음악감독 눈에 띄다. 노감독님 보시기에 이 젊은 일꾼이 엉성하게 엮은 선율이 제법 그럴듯하다. 젊은이는 사람좋은 노감독 덕분에 자작곡 몇 곡을 무대에 올리기도 하다.
재봉틀질 또는 망치질을 하다가, 대단한 작
곡가는 아니지만, 그 동네에서 인기 있는 노래를 쓴 사람으로 기억되는 일생을 살다가 가다.
동네 결혼식에서는 아직도 그가 쓴 춤곡이 울려퍼지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진 꿈의 줄거리다. 이 꿈 꾸다 일어난 새벽 잠결에 내 귀에는 푸치니의 <라보엠> 제1막에서 로돌포와 미미가 처음 만나 주고받은 노래가 울려퍼졌다.
노래가 울려퍼질 때, 꿈속 풍경은 아레나디베로나의 탁트인 객석이 아니라 화재 뒤 수리를 마친 마린스키극장 천장이 나와서 좀 웃기긴 했지만.


이쯤되는 '낭만적인' 꿈은, 그러나 요즘은 도통 꾸지 못한다. <라트라비아타>나 <라보엠>이나 <예브게니 오네긴>의 한 자락을 귓가에 듣다 일어나는 아침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모양이다. 아니 꿈결에, 대놓고 '정치적이면서도 낭만적인' 쇼스타코비치 음악을 듣기도 요즘 쉽지가 않다.
대신 얻은 꿈은 다큐멘터리다. 제2차세계대전 뒤의 기괴한 전후처리를 다룬 다큐멘터리가 꿈에 흐르곤 한다.




꿈에, 제2차세계대전 뒤 소련과 미국은 지구를 양분했다. 여기까지는 오늘날의 역사책과 같다. 그러고는 바로 대체역사가 펄쳐지다.

꿈에, 1945년을 다 보내고 1949년이 다 지도록 중국은 공산당 정권과 국민당 정권 어느 쪽도 대륙 전체를 석권하지 못하다. 밀고당긴 끝에 양자강 이북에는 모택동을 주석으로 하는 중국공산당 정권이, 양자강 이남에는 왕정위 정권의 잔당과도 연합한 장개석 총통의 중국국민당 정권이 들어서다.

꿈에, 일본 열도는 일단 미국 손에 들어가다. 단 사할린과 홋카이도는 소련 차지였다. 동경의 매카서 사령부는 오키나와에 미국 괴뢰정권을 수립하다. 명목상으로는 이때 오키나와는 일본에서 '독립'해 독립국이 되다.

꿈에, 괴뢰국 오키나와의 독립을 본 소련은 화가 머리끝까지 차오르다. 소련은 사할린과 홋카이도를 묶어 오키나와와 같은 소련 괴뢰정권을 수립하다. 오키나와, 그리고 사할린과 홋카이도가 빠진 일본은 천황제가 복귀하다.

꿈에, 한반도는 내전을 거쳐 제주에서부터 압록강과 두만강까지는 미군 지원을 받은 우익이 석권하다. 매카서 사령부는 애초부터 이왕가 복귀를 희망하다. 본국도 매카서 사령부에 그만한 권한을 주다. 이왕가가 복귀하고, 내각 총리에 이승만이 앉다. 다른 반쪽은? 내전 패배 끝에 김일성, 김책, 최용건, 무정에서부터 여운형, 김규식, 허헌, 조소앙 들은 짐 싸 압록강을 넘다. 그리고 북중국과 소련의 양해 아래, 북중국 조선족 자치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하다. 이때 수립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선 조선족 자치주장 주덕해가 김일성과 어깨를 나란히 하다.
 
꿈에, 어디로든 기어들어가기 애매해진 전쟁범죄자, 일제 부역자 잔당들은 남중국으로 모여들다. 조선, 대만, 나치스에 동조했던 북아프리카와 인도차이나의 프랑스 세력까지 남중국의 수도 남경에 집결하다. 남중국 정권 초대 문화상에 조선인 박태원 취임하다. 조선에서는 왕이었던 두 총독 미나미 지로, 아베 노부유키 들도 이곳에서 군사, 외교 고문으로 살며 1960년대까지 천수를 누리다 가다. 남중국의 지원을 받은 프랑스 제국주의 잔당들은 운남에서 자치주를 선포하고, 예서 아편을 가꿔 프렌치커넥션을 이루다.


꿈에, 만추리아, 만주, 동북삼성 등 지명도 복잡한 그곳이 문제의 핵심이 되다. 남중국은 미군의 지원에, 일본과 프랑스 제국주의 잔당까지 끌어모아 화북 진공과 만주 진공을 꿈꾸다. 북중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패로 화북 방어전을 펼치다. "북조선의 비열한 행태가 만주의 안전을 위협하고, 만주가 떨어지면 한반도가 순망치한이라", 대한민국 이승만 총리는 세계평화의 한반도의 안전을 위해 화북 진공에 참전하다.

꿈에, 이렇게 어지러울 때를 틈타 티벳은 영국 괴뢰국으로 독립하다. 몽골은 내외몽골 없이, 한 덩어리로, 소련 괴뢰국으로 독립하다. 베트남은 남북국 상태로 오늘까지 서로 으르렁거리다.

꿈에, 남중국의 화북 진공이 제3차세계대전으로 번지다. 남북한은 이들 사이의 스파이 국가로서 소련과 미국의 원조를 받아 먹고살다. 먹고는 살다. 그냥 이렇게 근근이 먹고살다.
 


꿈에, 베로나에 살 때는 극장 의상실의 예쁜 처녀와 연애 사건도 일으켰건만, 다큐멘터리 영상과 연대기만 흘러가는 꿈속에서는 아무도 없었다.
꿈에, 사람은 하나 없는 시간이 흐르고서는 몹시 찜찜한 채로, 개운치 못한 잠에서 깨야 했다.

이즈음 '낭만적인 꿈' 따위는 휘발하고 없다.
다만 기괴할 뿐이며, 그저 무서울 뿐인 꿈속을 다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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