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汝宗葬于是, 汝安歸之. 惟永寧!”
네 핏줄들이 여기 묻혀 있으니 너도 마음 놓고 돌아가렴. 길이 편안하기를!”

위 한 줄은 한유(韓愈, 768~824. 자는 퇴지退之, 호는 창려昌黎, 는 한문공韓文公)가 사십대에 열두 살짜리 딸 한나韓挐를 저세상에 먼저 보내고, 묘구덩이에 부친 마지막 이별의 말입니다. 자신이 딸 한나를 잃게 된 사연과, 한나를 가매장했다가 가족묘지로 이장한 사연까지 기록된 글 <여나광명병서女挐壙銘幷序>의 핵심인 이 바로 이 한 문장이고, 문장 전체의 맨 마지막 문장입니다.

한유 하면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를 떠올리시겠지요. 흔히 동아시아 한문문학사에서, 고문운동의 대표자 여덟을 꼽을 때 한유는 그 맨 앞에 자리하는 인물입니다. 한유는 당나라의 한유韓愈, 유종원柳宗元, 송나라의 구양수歐陽修, 소순蘇洵, 소식蘇軾, 소철蘇轍, 증공曾鞏, 왕안석王安石 이상 여덟 가운데 맨 앞이고, 이 순서가 일반적으로 당송팔가문唐宋八家文편차의 기본 얼개가 되게 마련입니다.

이상은 죽어서 받은 대접이지만 한유는 살아생전에 대단한 문벌 출신도 아니면서도 제 실력으로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들어서서는 당제국의 낭관郎官[황제를 수행하고 황제에게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자리], 국자좨주國子祭酒[국립대학 총장], 경조윤京兆尹[서울시장] 등 고위직을 두루 지낸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52세에 귀양과 다름없는 좌천을 당하고 아끼던 딸 한나마저 잃게 됩니다. 당나라 헌종이 부처의 손가락뼈를 궁 안으로 들여와 예배하자 당시 낭관이었던 한유는 저 유명한 <논불골표論佛骨表>를 헌종에게 올립니다. 헌종은 이 글을 읽고는 한유를 거의 죽일 뻔했습니다. 다행히 고위직에 있던 사람들이 힘써 말린 덕분에 귀양과 다름없는 조주 좌천으로 일을 막았지만요. 그때의 사연을 <여나광명병서女挐壙銘幷序>를 통해 볼까요.


한나는 내 넷째 딸이다
. 총명했으나 일찍 죽었다.
내가 소추관(小秋官_낭관의 별명)에 있을 때, 천자께 부처는 오랑캐 귀신이며 그 논리가 세상을 어지럽히니 일절 끊어 퍼져나가게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때 양나라 무제가 부처를 섬기다 신하인 후경에게 시해된 예를 들었던 것이다.
천자께서는 그 말이 상서롭지 못하다 여기시어 나를 조주로 내치셨다. 조주는 한나라 때로 치면 남해쯤 되는, 그러니까 게양과 같은 오지였다.
내가 길을 떠나자 담당 관리는 죄인의 가족을 서울에 머물게 할 수는 없다고 판단해 마구 몰아냈다. 열두 살짜리 한나가 병으로 누워 있을 때였다.
한나는 갑자기 아비와 이별한 마당에 수레가 요동치며 도로를 달리니 몸의 자연스러운 대사를 놓쳐 상의 남쪽 층봉역에서 죽었다. 곧 길 남쪽 산 밑에 묻었다.
5년이 지나서야 나는 경조윤으로 복직되었다. 이때 비로소 집안 자제들과 동서들을 시켜 이장하여 하남의 하양 한씨 가족묘지에 한나의 유골을 보내 장사지냈다.
하나는 원화 14(819) 22일에 죽었다. 이장해 가족묘지에 보내기는 장경 3(824)이다. 장례식은 같은 해 1111일에 치렀다.
그 명은 다음과 같다:

네 핏줄들이 여기 묻혀 있으니 너도 마음 놓고 돌아가렴. 길이 편안하기를!”
(汝宗葬于是, 汝安歸之. 惟永寧!)
-한유, <여나광명병서> 전문


중세는 혈연과 지연에 인간의 좌표와 위상을 설정합니다
. 개인은 아무도 아닙니다. 한 사람은 반드시 아무 집안의 누구입니다. 아울러 어디서 왔음곧 고향을 밝힐 수 있을 때에만 정체가 분명합니다. 핏줄과 고향을 전제조건으로 인격을 부여받는 사람, 중세인은 그런 사람입니다. 하여 길바닥 죽음은 상서롭지 못합니다. 온전한 죽음이란 반드시 고향 땅 가족묘지에 묻히는 죽음이어야 합니다.
어쩔 수 없이 그랬다 해도, 길바닥에 가매장했다는 것은 딸을 버린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한유가 중앙에 복귀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란 딸의 가족묘지 이장 말고 또 무엇이겠습니까.

이제 네 핏줄들이 여기 묻혀 있으니의 마음을 헤아리시겠지요?
드디어 가족묘지에 마련한 묘구덩이가 열리고, 저세상으로 가는 정문을 찾은 딸에게 한유는 마음을 놓으라고 합니다. 이는 한유 스스로를 위로하는 말이기도 하겠지요.

원문이 번잡해 일일이 싣지 못했으나 한나를 이렇게 이장해 묻기까지를 써 내려간 단문과 짧은 글 호흡의 행간에는 이런 사내가 보입니다.
자꾸 눈물이 나서 구구절절 쓰지는 못하겠으니, 얼른 짧은 문장 짧은 문단으로 저간의 사정을 기록하고, 남들 보는 데서는 먼저 간 딸에게 공식적인 마지막 인사를 전하고, 얼른 돌아서서 드디어 남몰래 울려는 사내.

살아생전에 제 글재주로 벼슬길을 돌파한 사내, 낭관에서 국자좨주에 경조윤까지 지낸 사내, 죽어서는 고문가의 맨 앞에서 대접받는 사내가 보여주는 자연스레 침통한 한순간이 이렇습니다. 그가 를 논하고, ‘스승의 길을 논하고, 역사의 정통을 따지고, 신비주의와 투쟁할 때보다, 바로 이순간의 그가 제게 더 친근하게 다가옵니다.

 

*군말_‘고문고문운동
동아시아 한문 문학사에서 시의 전범은 당시唐詩였습니다. 그렇다면 산문의 전범은? 단연 고문古文입니다. 이때 고문이란 그저 예스러운 글을 일컫는 말만은 아닙니다.

중국 역사에서 삼국시대 오
나라 이후 당나라 이전 시기를, 보통 오나라에서 수 나라에 이르는 여섯 개 왕조가 명멸한 시대라 해서 육조시대라고 합니다. 이 육조시대 이래 산문의 주도권은 병문과 과문이 잡고 있었습니다. 간단히 말해, 병문騈文4자구와 6자구 사용의 까다로운 규칙이 있는 문체입니다. 과문科文은 과거 시험 답안에서 유래한 상투화된 규범을 따라가는 문체입니다. 병문이건 과문이건 수사만 현란해지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수사rhetoric란 워낙은 설득력에 방점이 찍혀야 하겠지만 말과 글이 한번 자기최면의 호랑이 등을 타고 보면, 설득력은 어느새 스러지고 현란과 현학만 남는 모양입니다. 그때 식자들은 병문과 과문의 까다로운 규칙’ ‘상투적 규범지키기가 대견하다못해, 그만 설득력에는 눈을 감고 말았던 것입니다.

정리하면, 동아시아 한문 문학사 속의 고문이란 소통하는 글의 대화적 상상력과 생명력을 잃은 병문과 과문에 맞서 선진先秦시대 및 진한秦漢시대의 문장을 모범으로 삼겠다고 작정한 산문입니다. 고문은 평이하고 보편적인 어법과 논리적인 글쓰기를 추구하며, 문장의 자연스런 전개와 독창적인 표현을 염두에 둡니다.

또한 고문은 유학 부흥 운동과 짝을 이루는 문체이기도 합니다. 당나라 현종은 713년부터 741년까지 28년간만은 나라를 잘 이끌었지만 한순간에 자기 관리에 실패했고(양귀비는 관리 실패를 반증하는 아이콘이겠지요), 당나라는 이민족 침략을 포함해 안녹산과 사사명의 난 등의 난리를 겪게 됩니다. 이런 가운데 지방 군벌은 전국에 할거해 농민과 농촌을 직접 지배합니다. 이렇게 되면 황제와 수도를 정점으로 하는 지배 질서가 기우뚱하게 되지요.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일단의 식자들은 지배 질서를 바루기 위해서라도 유학을 다시금 적극적으로 불러내게 되었고, 그 표현의 우군이 될 만한 고문이 유학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것입니다. 요컨대 당대 위기에 대한 처방이 사상에서는 유학 부흥 운동(송나라의 성리학으로 귀결되는)으로, 문학에서는 고문 운동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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