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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6년에 태어나 1649년에 돌아간 조선 사람
조위한(趙緯韓,
호는
소옹素翁,
또는
현곡玄谷)은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아간 뒤 호조
참판까지 지냈으니 당시 조선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삶을 살았다고 하겠지요.
그런데
‘1576~1649년’
사이에는
임진왜란·정묘호란·병자호란이
자리합니다. 광해군 때 영창대군이 죽어 나간 권력 다툼인
계축옥사癸丑獄事도 자리합니다.
조위한은 왜란 때 종군했고, 계축옥사에 엮여 관직에서 쫓겨났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조의 쿠데타 이후에 다시 등용되고서는 이괄의 난도 겪었고, 호란 때 다시 종군합니다. 이 땅에서 정말 여러 일을 겪고 돌아간 셈입니다.
그나마 그에게는 물러나 쉴 데는 있었습니다. 외가의 인연이 있었던 전라도 남원이 그곳입니다. 쉬고 싶을 때, 정말 떠밀려서 쉬지 않을 수 없을 때 그는 남원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최척은 남원에서 접한 한 가족의, 참으로 기이한 사연을 <최척전崔陟傳>에 담았습니다. 조위한이 1621년에 탈고한 <최척전> 속 이야기 한 번 보실래요?
최척, 옥영네는 1597년 남원이 왜군 손에 떨어지면서 온가족이 뿔뿔이 흩어집니다. 최척은 귀환하는 명나라 군대를 따라 중국 절강으로 들어갑니다.
옥영은 최척과 고니시 유키나가 선단의 선장 돈우의 포로가 되어 나고야까지 끌려간 뒤, 돈우의 신임을 얻어 항해사가 되어 나고야, 오키나와, 베트남을 오가다 천운으로 베트남에서 최척과 재회합니다. 부부는 중국에서 둘째 몽선을 낳지요(첫째 몽석과는 남원에서 헤어짐).
그러고도 최척은 조위한처러 계속 전쟁을 겪습니다. 최척은 명과 후금이 요양에서 충돌하자 명나라 군대에 징집되어 요양으로 나갔다 후금의 포로가 되었고, 이때 명나라의 원군으로 온 조선군으로 파병된 아들 몽석(역시 포로 신세)과 포로수용소에서 재회한 뒤 함께 조선으로 탈출합니다.
한편 최척과 옥영의 며느리이자 몽선의 아내인 홍도는 마지막으로 고향으로 가보자는 일념 하나로 거친 바다를 뚫고 조선 땅 남원에 이릅니다. 지나친 설정일 수 있으나 홍도의 아버지인 명나라 장교 출신 진위경은 군법 위반으로 명나라로 귀환하지 못한 채 조선에 머물고 있었고, 홍도가 남원으로 향할 즈음에는 이미 남원 최척네에 살고 있었지요. 아무튼 이런 곡절 끝에 1597년 뿔뿔이 흩어졌던 가족은 24년 만인 1620년 모두 한 자리에서 서로를 얼싸안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24년이란 세월도 참으로 길고, 한 가족이 아우른 공간도 넓디넓기만 합니다만 덕분에 인물과 그 형상이 풍부하긴 하지요.
여성의 구애를 피하지 않았으며, 아내의 생사를 모르는 동안 수절 홀아비로 산 최척도 그때 사람과 사뭇 다른 데가 있어 보입니다.
옥영은 최척에게 먼저 구애했으니, 김시습 <이생규장전>의 여성 주인공 최랑 같은 인물입니다. 나아가 옥영이 눈물바람으로 가족의 재회를 바라는 인물이 아니라 앞날을 대비해 항해술을 익히고 합리적 판단으로 앞길을 여는 여성임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옥영이 조선을 향해 차분히 항해를 준비하는 장면이나 해적을 만났을 때 임기응변하는 장면을 보고 있으면 아, 이제 한국문학사에 드디어 새로운 여성이 나타났구나, 실감하게 되지요.
고니시 유키나가 선단의 선장 돈우도 그저 지나칠 수가 없습니다. 돈우는 독실한 불교도로서 전쟁을 혐오하지만 억지로 전쟁터에 나왔고 포로 옥영을 인간적으로 대합니다. 베트남에서 최척과 옥영이 만나자 두말없이 옥영을 보내줍니다.
이들뿐 아닙니다. 일본인 돈우와 함께 중앙권력에서 독립한 해상 세력의 활동을 보여주는 최척의 중국인 친구 송우, 미귀환 외국군의 삶을 보여주는 진위경(최척네의 사돈, 홍도의 아버지) 들의 형상도 이채롭기 그지없습니다. 그리고 여기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최척과 몽석이 갇혔던 포로수용소의 소장 말입니다.
최척과 최척의 아들 몽석이 후금의 포로수용소에 처음 함께 있을 때, 그 둘은 서로가 누구인지 몰랐습니다. 떨어져 산 지가 몇 해인데요. 기막힌 상봉부터 보실래요? 후금군이 명군을 격파하고, 조선군한테서는 항복을 받은 다음 이야기입니다.
“최척은 몽석과 함께 한 곳에 감금되었다. 그러나 부자는 서로 누구인지 알 리가 없었다. 몽석은 최척의 조선어가 서툰 것을 보고 조선어가 되는 명나라 병졸이 후금군에게 학살당할까 두려워 거짓으로 조선인 행세를 하는 줄 알았다[실제로 최척은 죽은 조선 병졸의 조선옷을 갈아입은 덕분에 학살을 면함].
몽석이 출신지를 물을 때면 최척은 오랑캐가 염탐한다고 여겨 횡설수설하며 전라도 사람 어쩌고, 충청도 사람 저쩌고 했다. 몽석은 의심만 쌓이고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해서 생긴 서로에 대한 경계심은 며칠 지나서야 풀립니다. 같은 포로 처지라 경계심보다 동정심이 점점 쌓인 결과였습니다. 둘 사이의 경계심이 풀리고, 이윽고 최척이 자신이 살아온 얘기를 털어놓게 되자, 그제야 부자는 서로를 확인하고 알아보게 됩니다.
그들의 말과 행동을 가만이 지켜만 보고 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포로소장입니다. 그는 원래 조선 땅 평안도 삭주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입 다물고 있다가 갑자기 조선어를 하며 나타난 후금 포로소장 앞에서, 최척과 몽석 부자는 놀라 자빠질 지경입니다. 두 조선인에게 포로소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겁내지 마라! 나도 조선 땅 삭주 사람이야. 토병土兵이었지. 삭주 부사가 어찌나 괴롭히는지 그 고통을 견딜 수 없어 온가족을 데리고 오랑캐 땅으로 들어왔다. 벌써 십 년이 넘었지. 오랑캐들은 성격이 소박한 데다 혹독한 행정도 없다. 인생은 아침이슬 같은 것이다. 왜 꼭 고통뿐인 고향에 얽매여야겠느냐?”
그러고는 두 사람의 사연을 안 이상 놔주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며 군법 위반에 따른 처벌을 감수하기로 합니다. 나아가 자신의 아들을 시켜 탈출로까지 안내하게 합니다.
보시는 대로입니다. 옛 평안도 의주와 창성 사이에서 압록강 너머로 만주를 바라보는 땅이 삭주입니다.
위에 나온 ‘토병’이란 상시 동원되는 예비군입니다. 이들은 군복, 군량, 무기까지 자비로 조달해야 합니다.
조선에서도 평안도는 함경도와 함께 변방입니다. 평안도와 함경도 수비 병력은 늘 이민족과 싸우며 지냅니다. 소총이 도입된 뒤로는 화약 무장과 총질까지 부담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부역과 조세가 덜하냐면 그것도 아닙니다. ‘홍경래의 난’을 기억하시겠지요. 평안도(함경도 사람들도 그렇고) 사람들은 2등 신민으로, 만만한 수탈 대상입니다.
상시 동원, 자비 부담의 병역, 수탈, 2등 신민의 삶... 그렇죠, 하필 고통뿐인 조선인으로 살 이유가 없죠. 그래서 조선인의 삶을 포기하고, 후금인의 삶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어떻게든 고향 조선으로 가려는 최척네에게는 마지막 인정을 베풀었습니다. 그는 여기서 마지막으로 딱 한 번 조선인입니다. 앞으로 조선인으로 살 여지는 없을 것만 같습니다.
“인생은 아침이슬 같은 것이다. 왜 꼭 고통뿐인 고향에 얽매여야겠느냐?"
원문은 이렇습니다:
“人生如朝露, 何必局束於捶楚鄕乎?”
운율감 대단한 말도 아니고, 수사가 빛나는 표현도 아닙니다. 그야말로 변방 국적 이탈자의 입에서 나올 법한 평이한 문장입니다. 그런데 이 문장이, 한미자유무역협정 앞에서, 의료보험민영화 앞에서, 이마트 피자 앞에서, 기업형수퍼마켓(SSM) 앞에서 자꾸 떠오릅니다. 여기서 그만 살고 딴 데 가서 살 자리 찾으라고, 누가 자꾸 등을 떠미는 듯한 요즈막입니다.
조위한은 왜란 때 종군했고, 계축옥사에 엮여 관직에서 쫓겨났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조의 쿠데타 이후에 다시 등용되고서는 이괄의 난도 겪었고, 호란 때 다시 종군합니다. 이 땅에서 정말 여러 일을 겪고 돌아간 셈입니다.
그나마 그에게는 물러나 쉴 데는 있었습니다. 외가의 인연이 있었던 전라도 남원이 그곳입니다. 쉬고 싶을 때, 정말 떠밀려서 쉬지 않을 수 없을 때 그는 남원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최척은 남원에서 접한 한 가족의, 참으로 기이한 사연을 <최척전崔陟傳>에 담았습니다. 조위한이 1621년에 탈고한 <최척전> 속 이야기 한 번 보실래요?
최척, 옥영네는 1597년 남원이 왜군 손에 떨어지면서 온가족이 뿔뿔이 흩어집니다. 최척은 귀환하는 명나라 군대를 따라 중국 절강으로 들어갑니다.
옥영은 최척과 고니시 유키나가 선단의 선장 돈우의 포로가 되어 나고야까지 끌려간 뒤, 돈우의 신임을 얻어 항해사가 되어 나고야, 오키나와, 베트남을 오가다 천운으로 베트남에서 최척과 재회합니다. 부부는 중국에서 둘째 몽선을 낳지요(첫째 몽석과는 남원에서 헤어짐).
그러고도 최척은 조위한처러 계속 전쟁을 겪습니다. 최척은 명과 후금이 요양에서 충돌하자 명나라 군대에 징집되어 요양으로 나갔다 후금의 포로가 되었고, 이때 명나라의 원군으로 온 조선군으로 파병된 아들 몽석(역시 포로 신세)과 포로수용소에서 재회한 뒤 함께 조선으로 탈출합니다.
한편 최척과 옥영의 며느리이자 몽선의 아내인 홍도는 마지막으로 고향으로 가보자는 일념 하나로 거친 바다를 뚫고 조선 땅 남원에 이릅니다. 지나친 설정일 수 있으나 홍도의 아버지인 명나라 장교 출신 진위경은 군법 위반으로 명나라로 귀환하지 못한 채 조선에 머물고 있었고, 홍도가 남원으로 향할 즈음에는 이미 남원 최척네에 살고 있었지요. 아무튼 이런 곡절 끝에 1597년 뿔뿔이 흩어졌던 가족은 24년 만인 1620년 모두 한 자리에서 서로를 얼싸안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24년이란 세월도 참으로 길고, 한 가족이 아우른 공간도 넓디넓기만 합니다만 덕분에 인물과 그 형상이 풍부하긴 하지요.
여성의 구애를 피하지 않았으며, 아내의 생사를 모르는 동안 수절 홀아비로 산 최척도 그때 사람과 사뭇 다른 데가 있어 보입니다.
옥영은 최척에게 먼저 구애했으니, 김시습 <이생규장전>의 여성 주인공 최랑 같은 인물입니다. 나아가 옥영이 눈물바람으로 가족의 재회를 바라는 인물이 아니라 앞날을 대비해 항해술을 익히고 합리적 판단으로 앞길을 여는 여성임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옥영이 조선을 향해 차분히 항해를 준비하는 장면이나 해적을 만났을 때 임기응변하는 장면을 보고 있으면 아, 이제 한국문학사에 드디어 새로운 여성이 나타났구나, 실감하게 되지요.
고니시 유키나가 선단의 선장 돈우도 그저 지나칠 수가 없습니다. 돈우는 독실한 불교도로서 전쟁을 혐오하지만 억지로 전쟁터에 나왔고 포로 옥영을 인간적으로 대합니다. 베트남에서 최척과 옥영이 만나자 두말없이 옥영을 보내줍니다.
이들뿐 아닙니다. 일본인 돈우와 함께 중앙권력에서 독립한 해상 세력의 활동을 보여주는 최척의 중국인 친구 송우, 미귀환 외국군의 삶을 보여주는 진위경(최척네의 사돈, 홍도의 아버지) 들의 형상도 이채롭기 그지없습니다. 그리고 여기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최척과 몽석이 갇혔던 포로수용소의 소장 말입니다.
최척과 최척의 아들 몽석이 후금의 포로수용소에 처음 함께 있을 때, 그 둘은 서로가 누구인지 몰랐습니다. 떨어져 산 지가 몇 해인데요. 기막힌 상봉부터 보실래요? 후금군이 명군을 격파하고, 조선군한테서는 항복을 받은 다음 이야기입니다.
“최척은 몽석과 함께 한 곳에 감금되었다. 그러나 부자는 서로 누구인지 알 리가 없었다. 몽석은 최척의 조선어가 서툰 것을 보고 조선어가 되는 명나라 병졸이 후금군에게 학살당할까 두려워 거짓으로 조선인 행세를 하는 줄 알았다[실제로 최척은 죽은 조선 병졸의 조선옷을 갈아입은 덕분에 학살을 면함].
몽석이 출신지를 물을 때면 최척은 오랑캐가 염탐한다고 여겨 횡설수설하며 전라도 사람 어쩌고, 충청도 사람 저쩌고 했다. 몽석은 의심만 쌓이고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해서 생긴 서로에 대한 경계심은 며칠 지나서야 풀립니다. 같은 포로 처지라 경계심보다 동정심이 점점 쌓인 결과였습니다. 둘 사이의 경계심이 풀리고, 이윽고 최척이 자신이 살아온 얘기를 털어놓게 되자, 그제야 부자는 서로를 확인하고 알아보게 됩니다.
그들의 말과 행동을 가만이 지켜만 보고 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포로소장입니다. 그는 원래 조선 땅 평안도 삭주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입 다물고 있다가 갑자기 조선어를 하며 나타난 후금 포로소장 앞에서, 최척과 몽석 부자는 놀라 자빠질 지경입니다. 두 조선인에게 포로소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겁내지 마라! 나도 조선 땅 삭주 사람이야. 토병土兵이었지. 삭주 부사가 어찌나 괴롭히는지 그 고통을 견딜 수 없어 온가족을 데리고 오랑캐 땅으로 들어왔다. 벌써 십 년이 넘었지. 오랑캐들은 성격이 소박한 데다 혹독한 행정도 없다. 인생은 아침이슬 같은 것이다. 왜 꼭 고통뿐인 고향에 얽매여야겠느냐?”
그러고는 두 사람의 사연을 안 이상 놔주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며 군법 위반에 따른 처벌을 감수하기로 합니다. 나아가 자신의 아들을 시켜 탈출로까지 안내하게 합니다.
보시는 대로입니다. 옛 평안도 의주와 창성 사이에서 압록강 너머로 만주를 바라보는 땅이 삭주입니다.
위에 나온 ‘토병’이란 상시 동원되는 예비군입니다. 이들은 군복, 군량, 무기까지 자비로 조달해야 합니다.
조선에서도 평안도는 함경도와 함께 변방입니다. 평안도와 함경도 수비 병력은 늘 이민족과 싸우며 지냅니다. 소총이 도입된 뒤로는 화약 무장과 총질까지 부담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부역과 조세가 덜하냐면 그것도 아닙니다. ‘홍경래의 난’을 기억하시겠지요. 평안도(함경도 사람들도 그렇고) 사람들은 2등 신민으로, 만만한 수탈 대상입니다.
상시 동원, 자비 부담의 병역, 수탈, 2등 신민의 삶... 그렇죠, 하필 고통뿐인 조선인으로 살 이유가 없죠. 그래서 조선인의 삶을 포기하고, 후금인의 삶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어떻게든 고향 조선으로 가려는 최척네에게는 마지막 인정을 베풀었습니다. 그는 여기서 마지막으로 딱 한 번 조선인입니다. 앞으로 조선인으로 살 여지는 없을 것만 같습니다.
“인생은 아침이슬 같은 것이다. 왜 꼭 고통뿐인 고향에 얽매여야겠느냐?"
원문은 이렇습니다:
“人生如朝露, 何必局束於捶楚鄕乎?”
운율감 대단한 말도 아니고, 수사가 빛나는 표현도 아닙니다. 그야말로 변방 국적 이탈자의 입에서 나올 법한 평이한 문장입니다. 그런데 이 문장이, 한미자유무역협정 앞에서, 의료보험민영화 앞에서, 이마트 피자 앞에서, 기업형수퍼마켓(SSM) 앞에서 자꾸 떠오릅니다. 여기서 그만 살고 딴 데 가서 살 자리 찾으라고, 누가 자꾸 등을 떠미는 듯한 요즈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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