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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논의 역설을 아는가. 바람처럼 빠른 아킬레스도 자기보다 앞서 출발한 거북이를 결코 추월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아킬레스는 거북이보다 100m 뒤에서 출발한다고 하자. 자! 경주가 시작되었다. 아킬레스가 100m를 달려 거북이가 있던 곳에 도착했을 때, 이미 거북이는 출발선에서부터 10m를 가고 있었다. 그 다음 아킬레스가 출발선에서부터 10m 지점에 이르렀을 때, 거북이는 이미 출발선에서부터 11m에 이르렀다. 그러니까 거북이는 아킬레스가 10m 달리는 동안 1m를 달렸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계속 추론하면, 아킬레스는 결코 거북이를 추월할 수 없게 된다. 그렇지만 누구나 알고 있지 않은가? 아킬레스는 거북이를 추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역설이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건 100m라는 구간, 10m라는 구간, 1m라는 구간, 10㎝라는 구간을 설정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해진 구간을 전제하고 논의를 전개하는 순간, 아킬레스는 결코 거북이를 이길 수 없다는 역설이 발생하는 것이다.

제논의 역설에 주목하려는 이유는 단순하다. 제논의 역설로 우리는 아킬레스를 절망에 빠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네가 노력해도 너는 결코 거북이를 추월할 수도 없어. 그러니 달리기를 포기하는 것이 나은 게 아닐까.’ 뭐, 이런 논리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아킬레스가 제논의 역설을 받아들인다면, 그는 결코 거북이를 추월할 수가 없다. 왜냐고. 그는 절망에 사로잡혀 경주를 포기할 테니까 말이다. 뛰기만 하면 아주 가볍게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있을 텐데, 뛰기를 포기하니 그는 결코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이다. 제논의 역설은 그래서 보수주의자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섹시한 논리일 수도 있다. ‘내가 이미 앞서 있다면, 너는 아무리 노력해도 나를 앞지를 수 없어.’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 체제나 보수주의자들은 제논처럼 자신들이 설정한 구간을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설득해야만 한다.

얼마 전 법원은 “2012년 MBC 노조의 파업은 언론 공정성을 지키기 위한 정당성이 인정된다”며 사측이 파업 참가 노조원들에게 내린 해고 등의 징계는 모두 무효라고 판결했다.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법원의 결정은 당연하다고 환호를 보냈다.

그렇지만 그건 순간적인 착각이었다는 것이 금방 드러난다. MBC 사측은 쿨하게 항소할 것이라고 밝혔기 때문이다. 허탈함이 찾아드는 순간이다. 이제 지방법원, 고등법원, 대법원, 그리고 헌법재판소로 이어지는 달리기 경주가 시작된 것이다. 그렇지만 항상 힘 있는 측이 조금씩 앞서 가게 된다. “MBC는 정영하 전 위원장 등 해고자 6명에게 각각 2000만원, 38명의 정직자들에게는 각각 1000만원을 지급하라!”는 명령은 일순간 정지되고, 다음 단계의 경주는 새롭게 시작되기 때문이다. 결국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여전히 해고자는 해고된 것이고 여전히 정직자는 정직된 것이다.

 

▲ “‘MBC 노조파업은 정당’ 하다는
당연한 판결에 ‘항소’ 하려는 사측
‘제논의 역설’ 현실에선 불가능
노동자들, 절망에 빠지는 일 없길”

아킬레스가 질 수밖에 없는, 혹은 아킬레스가 절망할 수밖에 없는 경주는 이렇게 진행되는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해 아킬레스가 절망할 때까지 이 경주는 지속되는지도 모를 일이다. 절차적 민주주의의 허구가 이처럼 분명하게 자신의 맨얼굴을 보이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아킬레스와 거북이의 경주처럼 무한한 절차를 만드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뿐이다. 상상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끔찍한 일 아닌가. 지방법원, 고등법원, 대법원, 헌법재판소라는 네 단계의 소송 절차가 만일 100단계의 소송 절차로 세분화된다면, 우리가 앞서 출발한 사람을 따라잡는 것은 그만큼 불가능할 테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잊지 말자. 앞서 출발한 사람들, 혹은 기득권자들은 자신을 추월하는 것을 힘들게 만들 수 있는 복잡한 절차들을 무한히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어쨌든 그렇게 상급법원에까지 이르는 절차들을 거치면서, MBC 노조원들뿐만 아니라 시민들은 나이를 먹어갈 것이고 어쩌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다른 일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처음에는 열광적으로 경주에 주목했던 사람들도 이제 심드렁해져서 다른 경주장에 몰려갈 것이다. 체제는 언제나 수많은 경주들을 새롭게 그리고 다양하게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주는 항상 체제가 마련한 절차에 대한 언제 끝날지 모를 고독한 싸움으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최종적으로 해고자들과 정직자들이 승리한다고 하더라도, 주어진 절차나 정해진 구간을 통과한 다음 그들에게 남은 것은 돈 몇 푼이나 잘해야 너무나 달라진 회사의 한직이 전부일 것이다. 그러니 이걸 경주에서 혹은 소송에서 이겼다고 말할 수 있을까. 경주를 치르느라 소비된 삶의 시간, 혹은 경주를 시작하느라 포기한 삶의 다른 기회들을 누가 다시 회복시켜줄 수 있다는 말인가.

“법 앞에 한 문지기가 서 있다”라는 구절로 시작되는 카프카의 단편소설 <법 앞에서>(Vor dem Gesetrz)가 우리에게 보여주려고 했던 것도 바로 이것이다. 법으로 들어가겠다는 어떤 시골 사람을 가로막으며 문지기는 지금은 들어갈 수 없지만 나중에 들어갈 가능성은 있다고 말한다. 시골 사람은 문지기의 말을 듣고 법 앞에서 기다리다 지쳐 어느 사이엔가 늙어 죽어간다. 이때 문지기는 죽어가는 그의 귀에 말한다. “이곳에서는 너 이외에는 아무도 입장을 허락받을 수 없어. 왜냐하면 이 입구는 단지 너만을 위해서 정해진 곳이기 때문이야. 나는 이제 가서 그 문을 닫아야겠네.” 우리 주변에는 법이라는 절차에 들어갈 헛된 희망으로 자신의 소중한 삶을 낭비하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어차피 경주를 해봐야 지는 게임이라며 절망하며 무릎을 감싸 안고 울고 있는 이웃들이 너무나 많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냥 아킬레스처럼 과감하게 달리면 된다. 어느 사이엔가 주어진 구간도 지나치고 앞서간 거북이도 가볍게 추월할 테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이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지금 이 순간 한 가지 사실만 명심하도록 하자. 절차에 포획되는 순간, 민주주의는 숨 쉴 수도 없다는 사실을.

강신주 |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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