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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민주주의를 두려워하는가?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자들이다. 선거를 통해 일시적이나마 권력을 획득한 대표자들이나 자본 집중을 통해 권력을 휘두르는 자본가들이 아니라면, 누가 민주주의를 두려워하겠는가. 그렇다. 민주주의는 권력의 독점이 아니라 분산을 지향하는 정치 이념이다. 군주제도나 독재정치가 민주주의와 대립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군주나 독재자는 항상 권력을 국민들에게 나누어주기보다는 자신에게만 집중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어떤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성숙했는지를 보여주는 척도는 지배자와 피지배자라는 분업 논리가 와해되는 정도로 측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민주주의에서만 ‘지배자=피지배자’라는 현기증이 나는 역설적인 도식이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독점적 자본을 통해 권력을 휘두르는 자본가를 논외로 하더라도,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등 우리 시대 대표자들이 가장 저주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자기의 임기 중에 벌어지는, 혹은 벌어질 수 있는 바로 집회와 시위다. 한마디로 말해 그들은 시민들의 정치적 행위, 즉 공동체에 대한 시민들의 발언을 극도로 두려워한다. 어쩌면 당연한 일 아닌가. 이제는 너저분하게 타성이 되어버린 사회계약론에 따르면, 시민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권력을 양보해서 대표로 선출된 사람들이 바로 그 대표자들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해묵은 지배자와 피지배자라는 정치적 분업 논리에 다시 직면하게 된다. 그렇지만 아무리 분업의 효율성을 강조한다 해도, 결국 정치적 의사결정을 대표자만이 행사한다고 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민주주의 이념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대의민주주의가 일정 정도 민주주의 이념을 왜곡할 수밖에 없는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선거 때만 국민들은 정치의 주인이 되어야만 하고, 대표자의 임기 동안 국민들은 정치에 대해 침묵해야만 한다. 어떻게 이것이 민주주의일 수 있겠는가? 헌법 전문 21조를 보면 다행히도 우리 사회는 기본적으로 민주주의 이념을 지향하고 있다. 네 개의 하부 조목으로 이루어진 헌법 전문 21조 중 처음 두 가지 조목은 다음과 같다. “모든 국민은 언론·출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진다.” “언론·출판에 대한 허가나 검열과 집회·결사에 대한 허가는 인정되지 아니한다.” 그렇지만 대표자들은 언론, 출판, 집회, 시위의 자유를 어떻게 해서든 제약하려고 안달이 나 있다. 당연한 일이다. 대표자가 대표자로서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려면, 피대표자들은 침묵하고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자신들의 헤게모니를 유지하기 위해 대표자들은 자신만이 정치적 주체이고 피대표자들은 정치적 객체이기를 원한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즉 집시법이다.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보장하는 헌법정신을 제한하려는 하위 법률의 쿠데타가 발생한 셈이다. ‘집시법’ 1조를 보면 이 법률의 목적이 명기되어 있다. “이 법은 적법한 집회(集會) 및 시위(示威)를 최대한 보장하고 위법한 시위로부터 국민을 보호함으로써 집회 및 시위의 권리 보장과 공공의 안녕질서가 적절히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어서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인정한 헌법정신을 근본적으로 억압하는 조목들이 줄줄이 등장한다. 집시법에서 흥미로운 것은 대통령이나 국회의원들이 있는 곳에서 집회와 시위를 금한다는 내용(11조)과 집회와 시위를 공공의 안녕질서를 위해 제약한다는 내용(12조, 13조, 그리고 14조)이다.

 

▲ “집시법 제한 시도 막아야만
‘치안’의 논리는 힘을 잃고
‘정치’가 숨을 쉴 수 있을 것”

전자를 통해 우리는 우리 시대 대표자들이 얼마나 반민주적이고 권위적인 존재인지 자각하게 된다.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정신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우리 대표자들이 어떻게 자기 앞에서 집회와 시위를 해서는 안된다고 기염을 토할 수 있다는 말인가. 민주주의를 입으로만 떠들고 실제로는 부정하는 이런 대표자들의 후안무치는 그냥 웃으면서 넘길 수 있다고 해도, 공공의 안녕질서를 위해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치안의 논리로 통제해야 한다는 주장은 쉽게 넘어가서는 안된다. 이런 주장은 시민들을 이간시킴으로써 시민들의 정치적 자유를 좌절시키는 교묘한 논리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경찰이 집회 소음을 더 엄격하게 규제하려는 방향으로 법 정비를 시도하고 있다. 물론 집회에서 발생하는 소음으로 피해를 받고 있는 시민들을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말이다.

이렇게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한다는 치안의 논리가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는 민주주의 이념을 질식시키고 있는 것이 현재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다. 치안(police)과 정치(politic)를 구분하면서 민주주의 정치의 실종을 개탄했던 랑시에르의 절규가 우리 귀에 파고드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인지도 모른다. <정치에 관한 열 가지 테제>에서 그는 말한 적이 있다. “‘그냥 지나가시오! 여기에는 아무것도 볼 것 없어!’ 치안은 도로 위에 볼 것이 아무것도 없으며, 거기에서는 그냥 지나가는 것 말고는 달리 할 것이 없다고 말한다. 치안은 통행공간이 그저 통행공간일 뿐이라고 말한다. 정치는 이 통행공간을 한 주체-인민, 노동자, 시민-가 드러나는 공간으로 변형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정치는 공간의 모양을 바꾸는 것, 곧 거기에서 할 것이 있고 볼 것이 있으며, 명명할 것이 있는 것으로 바꾸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랑시에르의 지적은 옳다. 그렇지만 정치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치안이 대신하고 있는 지금,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사람들은 치안이 아니라 당당히 정치를 관철해야만 한다. 그렇지만 여기서 직접 집회나 시위에 참여하지 않는 민주시민들에게 요구되는 자세가 한 가지 있다. 때로 집회나 시위가 교통 불편을 초래하고, 심지어 시끄러운 소음마저 만들어낼 수가 있다. 이때 우리는 그런 많은 소소한 불편들을 기꺼이 감내해야만 한다. 아니 더 나아가 집회나 시위에서 울려퍼지는 소리를 항상 뜨거운 애정으로 경청하려는 자세를 가져야만 한다. 언젠가 순서가 바뀌어 우리가 그 장소에서 집회와 시위를 하게 될 때를 위해서라도 말이다. 이럴 때 대표자들이 내세우는 치안의 논리는 힘을 잃고, 그만큼 민주주의가, 그리고 정치가 숨을 쉴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강신주 |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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