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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사랑이다. 철학의 영어 표현인 필로소피에 이미 사랑을 뜻하는 ‘필로’가 들어 있다는 것을 여기서 다시 상기시키고 싶지는 않다. 여기서는 단지 철학자는 무엇을 사랑하는지 이야기하고 싶을 뿐이다. 국가도, 자본도, 관습도, 체제도 아니다. 철학자가 사랑하는 것은 ‘덧없고 사소한 것’이나 ‘쓸모없는 실존’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철학자의 사랑이 싸구려 동정이라고는 오해하지는 말자. 철학자의 사랑은 ‘덧없고 사소한 것’을 영원하고 중요한 것으로 만들려는 의지, 혹은 ‘쓸모없는 실존’을 가장 쓸모 있는 실존으로 격상시키려는 분투이기 때문이다. 만일 철학자의 사랑이 그 결실을 맺는다면, 덧없고 사소한 것들이나 쓸모없는 실존들을 자기 부정이 아니라 당당한 자기 긍정에 이르게 될 것이다. 모든 진지한 철학자들이 죽을 때까지 가슴에 품고 있었던 꿈은 바로 이것이었다.


아우슈비츠를 경험했던 아도르노라는 철학자에게는 이것은 단순한 꿈이라기보다는 너무나도 절실한 소망이었다. 철학자로서의 절절한 소망이 이루어지지 못할 때, 인간에 대한 대량학살은 언제든지 다시 반복되리라는 것을 온몸으로 겪었기 때문일 것이다. “개념으로는 도달하지 못하는 것, 개념의 추상 메커니즘을 통해 삭제된 것, 아직 개념의 본보기가 되지 않는 것, 그런 것이 개념에 대해서는 절박한 것이 된다.” 그의 주저 <부정변증법>에 나오는 구절이다. 아도르노는 ‘절박함’이라고 말했다. 도대체 무엇에 대한 절박함이었을까? 기존 개념으로는 보호받지 못하는 것들은 언제든지 폭력에 노출되어 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철학자들이 항상 새로운 개념을 창조하는 데 시급을 다투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인지도 모른다. 조금이라도 게으름을 피우는 순간, ‘쓸모없는 실존들’은 글자 그대로 아무런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죽음에 이를 수 있으니까.


사소한 것을 사소하지 않게 만드는, 그리고 쓸모없는 것들이 쓸모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새로운 개념을 창조해야만 한다. 아감벤이 만든 ‘벌거벗은 생명’이라는 개념이 중요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반면 아감벤의 ‘벌거벗은 생명’에는 어떻게 다수가 소수를 억압하고 배제하는지, 그 은밀한 폭력의 논리를 폭로하는 개념이다. 벌거벗은 생명은 우리 사회에 횡행하는 왕따의 논리로 쉽게 설명될 수 있겠다. 왕따의 논리에는 누군가를 왕따로 만들지 않는다면, 자신이 왕따가 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전제되어 있다. 결국 누군가를 사소하고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어야 자신은 중요하고 쓸모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벌거벗은 생명, 즉 왕따를 만든다는 것이다. 벌거벗은 생명이나 왕따의 논리를 우리 내면에 공포의 형식으로 각인시킴으로써 체제는 소수를 억압하도록 만드는 다수를 만들어낸다고 말할 수도 있다.


‘벌거벗은 생명’이란 개념으로 아감벤이 우리 누구나 왕따의 논리에 개입될 수 있다는 슬픈 현실을 보여주었다면, 생성과 긍정의 철학자답게 들뢰즈는 ‘벌거벗은 생명’ 자체가 미래 사회를 결정하는 핵심 동력이라고 찬사를 보낸다. 그가 만든 소수성(minorite)이라는 개념이 중요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소수성이라는 개념이 비록 지금은 소수인 것처럼 보이지만 미래 사회의 공동체적 성격을 결정하는 생성의 계기를 가리킨다. 지금 들뢰즈는 사소하고 쓸모없어 보이는 존재들이 새로운 미래 사회를 구성하는 동력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소수성이라고 해서 정말로 수적으로 소수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특정 시점 주어진 공동체에서 대표되지 않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계속 자신들을 대표하라고 끈질기게 요구하는 개인들이 바로 진정한 소수성을 확보하고 있는 소수이기 때문이다. 한때 소수였던 여성이 그랬고, 한때 소수였던 노동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 성적 소수자 삶의 권리 주장한‘친구 사이’ 단체 발족 스무돌

소수성이 힘을 얻어가는 과정이 바로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과정


여기서 우리는 직감하게 된다. 결국 벌거벗은 생명이 점차 소멸되는 과정, 혹은 소수성이 힘을 얻어가는 과정이 바로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지만 벌거벗은 생명이 스스로 삶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들뢰즈의 의미에서 끈덕지게 소수성에 충실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민주주의에로의 길, 혹은 진보의 길은 결코 열리지 않을 것이다. 만일 외부에서 그들에게 삶의 권리와 발언권을 부여한다면, 외부에서는 필요에 따라 그것을 항상 다시 철회할 수도 있을 테니까 말이다. 스스로 얻은 것은 남이 빼앗기 힘들지만, 남이 준 것은 남에게 쉽게 빼앗기는 법이다. 이런 의미에서 1994년 2월7일 ‘친구 사이’라는 단체가 발족된 것은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이 단체의 시작이 바로 성적 소수자 인권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서막이기 때문이다.


체제에 훈육되어 작동하는 다수의 폭력에 고스란히 노출되었던 성적 소수자들이 드디어 삶에의 권리와 삶에의 발언권을 주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신을 위해, 그리고 친구들을 위해서. 이제 성적 소수자들은 어떤 때는 서로에게 따뜻한 옷이, 또 어떤 때는 서로에게 튼튼한 갑옷이 되어주게 된 것이다. 20년 만에 우리 친구들은 더 이상 이제 벌거벗은 생명에 머물지 않고 당당히 소수성을 외치는 주체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소수성이 공동체와 역사를 끌고 가는 추진력이 될 때, 당연히 체제는 다수의 반동적인 저항을 그만큼 더 강하게 조성하게 될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다수를 너무나 미워할 필요는 없다. 단지 다수는 체제에 길들여진 자신의 삶을 절망적으로 정당화하고 있거나, 아니면 주체로 당당히 살려는 소수자의 삶을 질투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까 말이다.


잊지 말자. 벌거벗은 생명들이 자신의 소수성을 견지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자신들의 삶을 공동체에 당당히 발언하지 않는다면, 민주주의는 화려한 미사여구일 뿐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그래서 민주주의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소수자들의 인권운동에 고마움을 피력해야만 한다. 소수성이 견지되지 않는 사회는 민주주의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사회일 테니까 말이다. 수많은 진지한 철학자와 진정한 인문학자들이 성적 소수자들의 활동에 적극적인 지지와 관심을 가지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끝으로 엄청난 고난과 고초 속에서도 마침내 성적 소수자 인권운동을 지금까지 성장시킨 관계자들의 용기와 지혜에 고맙다는 말, 감사하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다. 스무 살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파이팅!


강신주 |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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