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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사랑이야.’ 드라마 같은 제목의 기사에 눈길이 끌렸다. 훈훈한 로맨스 이야기인가 싶어 클릭해 몇줄 읽다가 그만 나도 모르게 욕설을 쏟아내고 말았다. 여중생을 성폭행해 임신까지 하게 만든 40대 연예기획사 대표가 무죄를 선고받았다는 내용. 법원은 피해자였던 여학생의 진술을 믿기 어렵다 했고, 순수한 사랑을 나눴다는 남성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아니나 다를까, 기사에는 무수한 댓글이 줄을 이었고 분노로 들끓었다. 2년 전의 일이었다.

며칠 전 같은 사안에 대한 대법원 최종 판결이 확정됐다. 달라진 건 없다. 아니, 통념상 납득되기 힘들거나 상식의 기준을 넘어서는 관계라도, 경우에 따라 위계나 강압에 의한 성폭행일지라도 법률가들이 사용하는 게임의 룰만 잘 파악한다면 ‘순수한 사랑’으로 포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만천하에 확인시켜 줬다.

이 무게를 짊어지는 것을 도와줘요.’ 2014년 10월29일 대학 캠퍼스 성폭행 반대를 위한 전국 행동의 날 시위의 포스터.

물론 언론을 통해 보도된 사건의 개요만을 본 나는 이 사안의 실체적 진실을 모른다. 또 다른 극적인 무언가가 숨겨져 있는 건지, 정말 그들의 관계가 순수한 사랑이었던 건지 단정할 수도 없다. 하지만 40대의 유부남이 15세의 여자 중학생을 성적 대상으로 삼았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뭐가 정상이고 상식인지 뒤죽박죽인 세상이 됐다지만 적어도 이건 아니지 않나.

법적 판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증거다. 무죄추정의 원칙을 근거로 해야 함도 옳다. 하지만 이번 사안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법을 다루는 이들 사이에 뿌리내린 성폭행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이다. 행위가 발생한 그 순간의 위력이나 협박 유무, 피해자의 대처 정도가 처벌과 판단의 주된 근거가 된다는 점 말이다. 어린 여학생이 쓴 ‘사랑한다’는 내용의 편지와 문자메시지는 판결의 중요한 증거가 됐다. 그런데 첫 만남에서부터 임신, 가출, 출산까지의 과정에서 그 여학생이 겪었을 무력감과 고통의 무게는 그 판단에 얼마나 작용했을까. 같은 판결문이 여학생에게는 “왜 그 정도 나이 먹고 앞가림도 못하냐”는 질책으로, 40대 남자에게는 “순애보의 주인공”이라는 감탄으로 들리는 것은 나뿐만일까. 성폭행 피해 여성을 두고 ‘흔들리는 바늘에 실을 꿸 수 없다’는 식의 가공할 망언을 일삼으며 능멸하던 우리 사회의 수준은 여전히 한발도 진전하지 않은 것 같다. 

이번 판결을 계기로 의제강간 연령기준을 높여야 한다는 주장도 다시 강해지고 있다. 의제강간은 사랑이나 합의 여부와 상관없이 강간으로 간주하는 것으로 현행 법령에선 만 13세 미만의 아동을 대상으로 적용된다. 즉 이 나이 미만은 성적 행동이나 성관계에 동의할 능력이 없으므로 이런 아동을 대상으로 한 성관계는 처벌받는다. 정치권이나 시민단체에서는 이 연령을 16세로 높이자는 주장을 꾸준히 제기해왔고 개정 법률안이 발의되기도 했지만 논란은 분분하다. 그렇다면 성숙한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적절한 연령대는 몇살인가. 문득 드는 의문은 정치적 결정권과 성적 자기결정권 연령의 판단기준이다. 투표권과 같은 정치적 결정권은 19세, 성적 자기결정권은 14세다. 둘 다 중요한 판단력이 필요한 일인데 그 차이가 너무 커 종잡을 수 없다.

성폭행에 대한 처벌은 엄정해야 하고 법적 장치도 잘 정비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에 앞서 청소년이 성폭력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사회 구조에 대한 고민과 해결책이 시급하다. 위계관계에서 권력이나 경제력을 무기로 청소년을 성적으로 착취하는 일은 너무나 흔한 일상이 됐다. 그 기반엔 “어릴수록 좋다” “딸 같아서…”라는 말로 통용되는 남성들의 그릇된 성적 가치관이 도사리고 있다.

얼마 전 코미디언 유병재씨가 낸 <블랙코미디>에 실린 시 한 편을 소개한다. 맘 같아선 국회의사당과 법원, 검찰청, 경찰서마다 붙여놓고 싶다.

‘딸 같아서 만졌다니, 딸 치려고 만졌겠지.’(‘딸 같아서 만졌다’)

<문화부 | 박경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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