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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롭던 공간에 느닷없는 괴성이 울려퍼진다. 곧이어 고요함을 날카롭게 가르는 소리가 또다시 들려온다. 실체가 애매했던 소음은 이제 분명한 언어로 구성된 고함소리라는 것이 확인된다. 누군가가 공공장소에서 고성을 지르고 있는 것이다. 몇 초만 들어보면 감이 온다. 소위 말하는 ‘진상 손님’이 또 출현했다는 사실을. 어디를 가도 이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식당, 카페, 마트, 버스, 지하철, 주차장, 심지어는 비행기까지, 서비스업이 존재하는 한 어디든 ‘진상’은 활개를 친다. 그들의 무례함과 뻔뻔함 때문에 서비스업계 종사자는 물론 일반 소비자마저 감정노동에 시달릴 판이다. 마치 천하의 중죄를 저지르기라도 한 것처럼 종업원을 닦아세우는 손님 때문에 불편했던 경험이 없는 이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뚜렷한 대책이 없다. 막무가내의 행동 기저에 깔린 기본 논리가 실은 이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돈을 냈으면 그에 응당한 권리는 반드시 100% 챙기겠다는 심리만큼 정당한 것이 또 있을까? 재화와 용역의 금전적 교환이라는 철칙 앞에선 그 어떠한 수모와 비애도 감수해야 마땅한 세상이다. 손님은 왕, 고객 만족은 최고의 가치. 닥치고 일이나 할지어다.

이와 같은 경제논리에 수긍하며 사는 모든 사람들은 싫든 좋든 따라오게 되어 있다. 하지만 사실상 서비스업에 속해 있지만 속성이 전혀 다른 ‘노동계층’이 있다.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업계에 ‘종사’하고 있는 이들은, 뭣도 모르고 전시, 교육, 심지어는 쇼비즈(Show-biz) 영역에까지 그 노동력이 활용되고 있다. 물론 계약서에 사인을 한 적도 없고, 4대 보험의 혜택을 누리는 것도 아니다. 잘살고 있다가 그저 재수 없게 잡혀와 주야장천 고객을 상대해야 하는 이주노동자, 바로 동물이다. 그들의 대표적인 일터는 동물원이다. 임무는 간단하다. 그냥 살아 있으면 된다. 목숨 자체가 재화이자 용역인 셈이다. 죽지 않고 살아 있기만 하면 해고당하지 않고 밥벌이는 할 수 있다. 자연 상태에서 이들은 다른 생물의 시선을 피하면서 사는 것이 기본이다. 특히 잠재적인 포식자인 덩치가 큰 직립 생물이 노려보는 것을 달가워할 동물은 단 한 종도 없다.

하지만 이 업계에 종사하는 이상, 야생 동물이 가장 필요로 하는 은닉과 프라이버시는 송두리째 내동댕이쳐야 한다. 사람들에게 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입장료가 얼마인데. 게다가 만성 적자와 인력부족 그리고 전문성 부족에 시달리는 동물원들은 보통 이들의 근무조건이나 복지 향상에 할애할 여지가 없다. 정글 출신이든 사막 출신이든, 야생성이건 주행성이건 시멘트 바닥과 쇠창살, 단순하기 짝이 없는 집무실이 제공된다.

사회생활이나 결혼 등에 대한 자유가 없음도 물론이다. 마음에 안 맞는 상대라도 그나마 주어지면 운이 좋은 편이다. 홀로 쓸쓸하게 짧은 ‘수생(獸生)’을 마감하는 일이 허다한 곳이니 말이다. 이들의 경우는 감정노동이라기보다는 존재노동이라 불러야 더 적확하지 않을까. 죽지 못해 산다는 건 바로 이런 것이다.

물론 동물원이 죄다 똑같은 수준으로 열악한 것은 아니다. 걔중에는 좀 더 나은 환경과 관리방침으로 운영되는 곳도 있긴 하다. 그러나 발견되는 문제의 속성과 양상의 측면에서 보면 동물원 간의 수준 차이는 크지 않다.

민간동물원 안에 있는 원숭이 (출처 : 경향DB)


최근 동물보호단체 ‘동물을 위한 행동’에서 발간한 동물원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의 모든 민영 및 공영 동물원에서 생태적이지 못한 전시 환경, 정형행동의 만연, 부족한 행동풍부화, 비체계적인 개체수 조절, 예산 확보의 어려움 등의 문제가 일관되게 발견된다. 좁고, 낡고, 더럽고, 어둡고, 무료하고, 황량하고, 답답하고, 관람객에게 무방비로 노출된 사육장이 아직도 너무 흔하다.

게다가 여러 동물원은 동물에게 무리한 ‘추가 근무’를 강요한다. 이른바 쇼에 차출되어 자신의 생태와 전혀 무관한 행동을 해야 하거나, 불특정 다수에게 마구잡이로 만져지도록 몸을 내맡겨야 한다. 어찌 보면 어쩔 수 없이 유흥업소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비견되는 신세이다. 여기서 한 가지를 꼭 짚고 넘어가야 한다.

동물이 가두어져 산다는 것은, 동물이 자연에서 절대로 만나지 않고, 진화적으로 전혀 준비가 안되어 있는 그런 종류의 고통이다. 잡아먹히면서 몸이 뜯기는 고통, 산불이나 용암에 몸이 타는 고통, 질병의 고통, 물에 빠지거나 질식하는 고통, 모두 자연계에 원래부터 존재하며, 지구 역사상 모든 동물이 겪어왔다.

그러나 한 공간에 가두어진 채 먹이는 계속 주어져 죽지 못하게 만드는 고통, 이것은 전혀 새로운 것이다. 그래서 동물을 가둬 키우는 모든 행위는 실로 미안한 일이다. 그러니 이왕 키울 거면 잘해줘야 한다. 이것은 우리의 당연한 사명이요 의무라고, 야생학교는 명심한다.


김산하 | 영장류 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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