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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절 스스로 몰아치는 강물이 있다. 한국 정치는 험한 물줄기와 함께 몇번을 굽이쳤을까.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는 없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의 말로 한 해 ‘정치의 이면’을 되새겨 본다.    

‘참모정치’가 도드라졌다. 행정관 인사 문제와 대통령 보좌진의 발언이 주요 기사로 등장했다. 참모의 비전이 리더를 통해 투영되는 정치가 참모정치다. 비전이 버겁다면 직언이라도 서슴지 않아야 한다. 당나라 현종의 참모 한휴는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현종은 “한휴 덕분에 나는 야위었다. 그러나 천하는 살찌지 않았는가”라고 했다. 문재인 정부의 참모정치는 선글라스,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첫눈이 대신했다. ‘참모’만 있고 ‘정치’는 없는 참모정치. 지난 2월 칼럼은 ‘말과 글의 참모, 양정철’을 썼다. 그는 언어 민주주의라는 비전을 꺼냈다. 이후 안부 인사에 “광장에 나오는 이명훈 심정” “허망해”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라고 답했다. 요즘 ‘양비’ 역할론이 자주 들린다.

‘청와대 정부’는 동반 화두였다. 집권 초반엔 청와대 구심력이 강하게 작동하고, 필요한 측면도 있다. 그럼에도 청와대는 대통령을 보좌하는 조직일 뿐, 대통령 통치권을 대신하는 조직이 아님은 반박 불가 원칙이다. 정치평론가 박상훈 박사는 청와대 정부를 ‘대통령이 임의조직(청와대)에 권력을 집중시켜 정부를 운영하는 자의적 통치체제’라고 했다. 비대한 청와대 권력이 책임정치를 무너뜨렸다는 완곡한 해석이다. 지난 1년 당정, 국회에선 ‘정치가 사라졌다’. 8·2 부동산대책은 장관 휴가 중에 발표됐다. 장관들은 정책 보좌관 선정에도 청와대 눈치를 살펴야 했다. 기획재정부 장관과 청와대 정책실장 간 비정상적 갈등이 연일 터져나왔다. 더불어민주당은 청와대 내부 기강해이 문제에 대국민사과를 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에 격노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튿날 민주당은 조국 민정수석 지키기로 태세를 전환했다. ‘광주형 일자리’ 추진 과정에선 역주행도 감지됐다. 대타협이란 참여주체 모두가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라는 사회적 압박이다. 그런데도 약자들에게 이만큼만 더 손해 보라 하고, 달라지라고 요구했다. 민주노총에 대한 과도한 적대감까지 보태졌다. 진보정권은 약자 편에 서라고 시민들이 주권을 모아준 결과물 아닌가. 집권여당은 어떤 호소나 충언도 하지 않았다.

정권교체 직후 ‘민주당 정부가 반갑다’는 글을 썼다. 당의 철학과 가치를 국정 중심에 두는 정부를 기대했다. 그러나 한 해 마지막 칼럼을 정리하는 지금까지도 나는 ‘문재인 정부’라 쓰고 있다. 

청와대 정부는 직접 여론을 동원하는 데 공 들였다. 청와대와 여야의 대면 횟수가 줄 수밖에 없다. 정치의 기능 약화는 필연적이다. 20대 총선은 다당제를 낳았고 정국도 사안에 따라 범진보 대 범보수, 자유한국당 대 비자유한국당, 진보·보수 동맹 등으로 다변화됐다. 다수연합을 고려한 전술이 필요했다. 하지만 거대 정당은 양강 체제를 포기하지 않았다. 새해 예산안, 선거제 개편 싸움만 봐도 그렇다.

정치의 권위가 무력해지면 강자의 질서가 사회를 압도한다. 유치원 이슈가 증명한다. 민주당 박용진 의원의 고군분투로, 국회가 주도했던 유일한 의제였다. 국회는 기득권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혀 끝내 유치원 개혁입법을 처리하지 못했다.

9월 민주당 전당대회 이후 ‘이해찬에 반(反)하다’를 썼다. 이해찬 대표가 강조했던 최고의 협치를 여야 지분 분배에 한정한다면, 벼랑 끝에 몰린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보수야당이 자신들의 지지층을 설득할 만큼 챙겨주는 것이라고, 그런 정치력을 보여달라고 했다. 원내 1·2당 의원들이 지역구 예산 챙긴 것이, 세비 인상에 의기투합한 것이 최고의 협치인가. 청와대가 집권여당의 정치력 부재를 모두 책임질 이유도 없겠지만 정치가 사라진 현실에서 마냥 비켜 서 있기도 머쓱한 상황이다.        

‘오재영 1주기’(3월)와 ‘노회찬의 하늘’(7월)에서 진보정치의 못다한 꿈을 전하려 했다. 그들이 떠난 자리엔 깃발만 나부낀다. 소수정당 대표들은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촉구하며 단식 중이다. ‘유령 인간’들을 태우고 달리던 6411번 버스는 동시다발로 멈춰 서고 있다. 서울 마포구 아현2동 재건축 구역의 한 철거민이 “내일이 오는 것이 두려웠다”며 생을 마감했다. 충남 태안군 한 발전소의 20대 비정규직 노동자가 연료공급용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했다. 동료들은 “우리도 국민이다”라고 절규했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이 관객 300만명을 넘길 기세다. 흥행이 가리키는 지점은 분명하다. IMF 때보다 호황이니, 불황이니 하는 논쟁보다 가난한 사람들의 생존 공포를 덜어주는 게 중요하다는 것.

“누구라도 늘 자기 안에 북쪽을 지니고 간다. 좀 더디지만 북쪽에 쌓인 눈도 때 되면 녹고 꽃은 한꺼번에 붉고 푸른 빛을 몰아터뜨리기도 했다”(이면우, 생의 북쪽).

없는 사람들의 계절은 오로지 겨울뿐이다. 2018년 끝자락에서 ‘한꺼번에 붉고 푸른 빛을 몰아터뜨리는’ 2019년 정치의 봄을 기다린다.

<구혜영 정치부 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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