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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정의당 노회찬 전 원내대표는 서울 마포 단골 횟집을 찾았다. 참모 두어명과 함께한 저녁자리였다. 노 전 원내대표는 웬만하면 사석에서 정치 얘기를 하지 않는다. 그날은 달랐다. 진보정치 30여년이 잔 속에서 출렁였다. 누군가 물었다. 노회찬의 꿈은 뭐냐고. 그는 “한 나라의 지도자가 돼야지. 2022년 대선에서 내 얘기를 하고 싶다”고 했다. “2022년 대선 출마요? 여태 아무 말도 안 했잖아요.” “당신들이 도와줘야지.” 정권은 교체됐지만 진보정치는 고달팠다. 사표론이 사라졌나 싶더니 민주정부가 들어선 뒤엔 2중대론에 시달렸다. 그도 이런저런 오해를 받았다. 그러나 노회찬 그에겐 독자적 진보정당 이외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20대 총선 무렵부터는 차세대, 미래를 자주 말하곤 했다. “마들연구소(전 지역구인 서울 노원의 정치학교)를 후배들을 키우는 정치 아카데미로 만들까.” 독자적 진보정당을 넘어 이미 진보적 대중정당까지 설계하고 있었던 것이다.

진보가 홀로 외쳤던 과제는 정권교체 후엔 누구나 말하는 과제가 됐다. 그러니 진보는 더 힘겹다. 능력을 검증받아야 한다. 진보적 대중정당은 고사하고 독자적 진보정당 의지마저도 흔들리고 있다. 그렇다고 그의 꿈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늘 단단할 줄 알았다.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서 고인 ‘노회찬’으로 만날 줄이야. 소설가 박상륭이 “공문의 안뜰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바깥뜰에 있는 것도 아니어서…”라고 한 <죽음의 한 연구>가 생각났다. 그의 빈소는 5일장 내내 삶과 죽음의 경계였다.

긴긴 추모 행렬을 지켜봤다. 안타까운 죽음이지만, 돈 받은 정치인을 과도하게 미화한다는 비판도 섞여 있다. 추모객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한 시간 이상 줄 지어 기다리다 영정 앞에 국화를 놓았고 밤새 향불을 피웠다. 어떤 사람이었길래, 어떤 정치를 했길래….

그는 답이 아닌 질문이 몸에 뱄다. 정치인의 일반적 유형이 아니다. 성찰하며 살았다는 말이다. 어느 봄날, 함께 식사를 마치고 집회가 한창인 국회 정문 앞을 지나던 길이었다. 그는 혼잣말 하듯 “내가 머리띠 묶고 구호 외쳤을 때 시민들은 나를 응원했을까”라고 물었다. 다른 이에겐 태도 문제였을지 모를 일상의 경건함이 어쩌면 그에겐 평생의 가치관이겠구나 싶었다. 지금까지도 차고 넘치게 흘러나오는 생전 입법활동과 공감능력이 말해준다. 

촌철살인의 말솜씨도 다른 이유가 필요할까. 꾸역꾸역 하루를 살아가는 약자들을 존중했고, 기득권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으니 거짓을 말할 일도 없었을 테다. 두 손을 포개고 고개를 떨군 국회 청소노동자들의 눈물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는 되도록 힘든 길을 택했다. 신념과 소신도 키우고 넓혀야 무기가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혁명이 전부였던 시절 진보정당을 세웠다. 진성당원제, 여성할당제 도입은 진보의 의회주의 시도로 평가받았다. 진보의 신뢰가 중요했던 시절, 오히려 진보의 전망(미래)을 택했다. 민주노동당에서 진보신당, 통합진보당을 거치며 개량주의자, 분열주의자 비판을 감수했다.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2014년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서울 동작을)에도 결국 출마했다. 개인의 희생부터 가르치고, 선배 리더가 이끄는 대로 움직였던 진보정당을 골목길에서 대로변으로 끌고 나왔다. 연동형 비례대표제, 결선투표제 등 제도 개혁을 외쳤다. 양당제가 지배하는 한국 정치에서 무모한 도전으로 취급받기 일쑤였다. 그를 볼 때마다 “영웅적 패배보다 지루한 성공을 선택하는 게 낫다”고 한 버나드쇼의 말이 떠오르곤 했다.

정치 입문 이후 그의 질문과 그의 길이 향한 곳은 당이었다. 시민들은 진보 울타리의 대중 정치인으로, 동지들은 가세가 기울어 가족들이 하나둘 떠날 때도 가난한 집(진보정당)을 지켰던 장남으로 그를 기억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노 대표(지인들은 대표라고 부른다)는 상당히 완고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완고함으로 지키려 했던 게 분명했으니 유연했다. 

그토록 아꼈던 당이 자신 때문에 망할지 모른다고 판단한 뒤엔 그에게 다른 결론은 없었을 것이다. 7월23일 A4용지 두 장 23줄짜리 유서에 ‘당’, ‘당원’이란 단어를 7번 썼다. 시민들은 측은지심으로, 동지들은 미안함으로 그를 보냈다.

그와 부인 김지선씨는 몇 해 전 자식처럼 키우던 강아지 ‘하늘이’를 잃었다. 새 강아지를 들여오지 않고 하늘이를 닮은 인형을 샀다고 한다. 인형을 하늘이처럼 그리워했다니. 두 가지 생각이 스친다. 

하나는 그의 마음에 깃든 진보의 가치는 당이 어떤 처지라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 또 하나는 그 가치는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다만 실천하면서 기억할 뿐이라는 것. 땅에서 고달팠던 삶이 하늘에선 빛나는 꿈이길 바란다.

<구혜영 정치부 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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