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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휴가 때 앙코르와트의 거대하고 아름다운 유적을 둘러보다가 문득 허망해졌다. 붓끝을 가볍게 놀리듯 돌에서 깎아낸 무희와 불상들을 촘촘히 새겨넣은 이 거대한 석조 도시를 크메르인들은 왜 기껏 지어놓고 버린 것일까. 수백년 수령의 나무뿌리들이 거대한 뱀처럼 한때의 찬란함을 조용히 집어삼키는 폐허 앞에서 무기력한 호기심이 떠올랐다.

역설적이지만 이 석조 도시가 원인이라는 학설이 있다. ‘광란의 토목공사’로 국력을 소진했다는 것이다. 1181년 집권한 자야바르만 7세는 베트남 참족에게 점령됐던 앙코르와트를 되찾은 뒤 계획도시 앙코르톰 공사를 시작했다. 1변에 3㎞에 달하는데, 선왕 수리야바르만 2세가 지은 동서 1.5㎞ 규모인 앙코르와트의 2배다. 이외에도 반테이끄데이를 비롯한 불교 사원과 50개의 탑에 200개의 웃는 부처 얼굴을 새긴 바이욘 등이 그의 치세에서 끊임없이 솟아올랐다. 8세기에 창시된 크메르 제국 사상 가장 독실한 불교도가 된 그는 불사(佛事)를 통해 깊은 신앙심을 표현했다. 여기에는 수많은 백성들이 장기간 동원됐을 것이다.

이것이 제국의 정점이었다. 이후는 쇠락뿐이었다. 1218년 그가 사망한 이후 왕조는 200년간 이전 수준의 기술 및 건축, 예술, 문학적 성취를 뛰어넘지 못했다고 역사학자들은 평가한다. 1431년, 태국의 침략으로 제국은 붕괴했다. 19세기 후반 유럽 식민주의자들이 이곳을 재발견했을 때, 황금으로 지붕을 칠했던 이곳의 대부분은 무너져 내리는 돌무덤에 불과했다.

물리적 자원과 무형의 제도를 모두 아우르는 ‘국력’은 국민의 힘이다. 어느 사회든 저수지의 물처럼 한정돼 있다. 새로 채워넣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쓰느냐가 더 중요하다. 방향을 책임지는 것은 왕, 대통령, 총리 같은 정치 엘리트들이다. 특권을 누리기에 앞서 공동체의 운명을 걱정하고 바른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 그래서 제(齊)나라 관중(管仲)은 국민을 함부로 동원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상과 벌이 공정한데도 군사력이 약한 것은, 함부로 백성을 동원하여 백성들을 지치게 했기 때문이다 … 백성을 부려서 지치게 하면 백성들의 힘이 다하여 고갈된다.”

국민의 마음인 ‘여론’ 역시 국력이다. 정치인이 함부로 도구화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소셜미디어 때문인지 세계 금융위기 이후에는 여론 동원 정치가 대세다.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인 ‘브렉시트’가 대표적이다. 금융위기 여파로 유로존이 휘청이던 2010년 당시 집권한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EU 탈퇴 여론이 불거지자 ‘국민투표’를 하자며 무책임하게도 결정을 국민에게 떠넘겼다. 이에 포퓰리스트 정치인들이 승리하면서 한때의 제국은 이제 유럽 금융중심지 자리까지 내놓게 됐다. 존 버커우 영국 전 하원의장은 브렉시트가 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의 최대 실수라고 말한다. 포퓰리즘 정치의 진짜 패자는 영국의 미래 세대다.

정치인들이 공동체의 미래와 가치에 대해 고민하길 멈추고 말초적인 언사로 ‘좋아요’ 클릭수에 매달리고 지지율만 챙길 때, 국가는 분열되고 대가는 내일의 국민이 치르게 된다. 세상에 공짜 점심 없다.

<최민영 경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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