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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도 캐나다 총리와 통화 문재인 대통령이 3월26일 청와대에서 저스틴 트뤼도 캐나다 총리와 통화하며 코로나19 공조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청와대 제공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도 지난달 24일 밤 두 정상의 통화 소식을 접했을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코로나19 진단키트 등 의료장비 지원을 요청했다는 뉴스를 전달받은 김 위원장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대구·경북을 중심으로 코로나19가 급속히 퍼졌다는 소식에 자신이 문 대통령에게 위로와 격려의 친서를 보낸 게 불과 몇 주 전 일인데, “초대국”을 자임하는 미국의 대통령이 남조선에 도움을 청했다고? 대남 무시 전략을 구사하며 북·미 정상 간 친분 관계 유지에만 신경써온 김 위원장도 내심 놀라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한국에 코로나19 물품 지원을 요청해온 나라는 미국만이 아니다. 지난달 말까지 한국에 방역물품 공급을 정부 차원에서 요청한 나라는 81곳, 민간 부문까지 더하면 117개국에 달한다. 루마니아는 한국산 방호복과 진단키트를 긴급 수송하기 위해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수송기까지 동원했고, 덴마크 보건당국은 한국 업체의 진단키트 구매 제안을 거절했다가 대국민사과를 해야 했다. 북한의 ‘혈맹’인 중국 역시 일찌감치 한국으로부터 마스크 등 의료용품을 지원받았다.

전 세계가 코로나19를 앓는 상황에서 북한 역시 예외는 아닐 것이다. 여전히 북한 당국은 공식적으로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했다고 밝히지 않고 있지만 수천명의 ‘의학적 감시 대상자’가 발생하고, 유치원과 초·중·고교 방학을 거듭 연장하고,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대중교통 이용을 제한하는 등 초특급 방역에 나선 것을 보면 여타국의 상황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최근 북한은 중국·러시아·이란 등과 함께 코로나19 대응을 위해 서방의 제재가 해제돼야 한다고 촉구하는 서한을 유엔 사무총장에게 보냈다. 코로나19 대응을 명분 삼아 제재 완화에 대한 국제적 여론을 조성해보려는 목적일 것이다.

김 위원장이 민생과 경제에 역점을 두고 선대와는 차별화된 리더십을 보이고자 한다면 지름길을 두고 이렇게 돌아갈 일이 아니다. 핵무기 개발에 따른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와 코로나19 대응은 엄밀히 별개 사안이며, 둘을 엮어본다한들 해결될 일도 아니다. 지금 김 위원장이 손을 내밀어야 할 곳은 자명하다. 이는 자존심 문제가 아니며, 국력이나 체제의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생존과 안전을 위함이다. 지난해 2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김 위원장에게 수모를 안긴 채 매몰차게 회담장을 떠났던, 늘 아쉬울 게 없어보이던 트럼프 대통령도 자국 내 코로나19 확산이 걷잡을 수 없게 되자 동북아의 작은 나라에 SOS를 보냈다.

문 대통령은 3·1절 기념사에서 “북한과 보건 분야 공동협력을 바란다”며 감염병 확산에 대한 남북 공동대응을 제안했다. 트럼프 대통령도 최근 김 위원장에게 보낸 편지에서 코로나19 방역에 협조할 의사가 있다고 했다. 지금 김 위원장이 해야 할 일은 문 대통령의 제안을 수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국내 여론과 미국을 문 대통령이 어떻게 설득하고 돌파해 나가는지를 지켜보는 것이다. 남북관계 개선을 외치는 문재인 정부에 진정성과 역량이 있는지를 가늠할 시험대로 삼아보라. 다시 실망하게 된다면 그때 가서 비난 담화를 쏟아내도 늦지 않다.

<이주영 | 정치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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