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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직설

하늘의 절반, 여성

opinionX 2017. 5. 18. 11:20

“사장님, 일이 너무 힘들어요, 작업장이 너무 추워요. 목에서 까만 핏덩이가 나와요. 팔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힘들어요. 시너 냄새 때문에 머리가 아파요. 발이 퉁퉁 부었어요. 못하겠어요. 쉬고 싶어요. 쉬고 싶어요”는 한강의 기적이 찬양되었던 시대에 우리 하늘의 절반을 지탱하고 있던 한국 여성노동자들의 절규였다.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1972년에 유신체제를 갖추면서 수출지향적 산업화를 경제발전의 전략으로 삼았다. 공장들이 늘어나면서 한국 경제는 1970년대 내내 연평균 약 8%씩 급속한 성장을 경험하게 되는데, 사람들의 삶과 일하는 방식 또한 크게 변하게 되었다. 어떤 이들은 생활수준이 오르고 장밋빛 미래를 그려보기도 했지만, 어떤 이들은 공장에서 가혹한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었다.

이 당시 특히 젊은 여성들의 삶이 변했다. 1950년대만 하더라도 인구의 절대다수가 농촌에서 일하였다면 1970년대부터 많은 여성들이 남성보다 더 빠르게 도시 임금노동자가 되었다. 경제발전에 큰 몫을 한 섬유, 의료, 전자산업과 같은 경공업 분야의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여성이었다. 농촌의 딸들은 공부할 남동생과 오빠를 위해 그리고 집에 생활비를 보내기 위해 도시로, 공장으로 대거 진입하였다. 하지만 여성의 임금은 남성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였고,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는 여성이 폭력적인 근로조건 속에서 순종적이면서도 부지런하게 일하길 요구했다. 한국 여성노동자들은 이 비인간적인 불평등을 모두 삼켜냈다.

한국여성노동자회 등 23개 여성노동단체로 구성된 무급타파행동단이 11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여성 비정규직 임금차별타파의 날’ 선포식을 하고 있다. 행동단은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이 정규직 남성노동자들의 35.8% 밖에 되지 않는 임금을 받는다고 주장했다. 이 격차를 날짜로 환산하면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는 5월11일부터 연말까지 무급으로 일하는 셈이다. 김영민 기자

40여년이 지난 지금 한국 여성의 삶은 어떠한가. 각종 보고서에서 한국의 젠더불평등은 최악의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 여성의 고용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보다 아래인데 여성이 운 좋게 취직했더라도 임금수준은 여전히 남성의 65% 정도밖에 안된다. 남녀 임금격차 수준은 OECD 국가 중에서도 가장 심하고 2위인 에스토니아에 비해서도 그 격차가 한참 크다. 우리나라의 나쁜 일자리에는 여성이 집중되어 있고, 관리자급으로 직위가 올라갈수록 남성이 압도적으로 많다. 출산과 양육기에 여성이 일을 그만두는 비율도 한국이 가장 높다. 여성이 중고령자가 되면 불안정한 일자리로 재진입하거나 다시 부모, 나이든 남편, 손주를 돌보는 무급노동을 한다.

한국 여성이 불평등을 경험하는 것이 능력의 차이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에서 한국 학생들의 성적은 국제적으로 최상위권이다. 이에 더해 한국 여학생들은 남학생에 비해 독해력 그리고 수리력에서도 더 높은 점수를 받는다. 국제적으로도 가장 우수한 한국의 여학생들은 성인이 되면서 불평등종합세트를 차례대로 경험하게 된다. 입사 과정에서, 임금수준과 승진의 기회에서, 출산과 양육기에, 그리고 중고령 여성이 되는 과정에서 한국의 여성들은 체념과 순응, 경쟁과 남성화, 분노와 투쟁 중 어떤 선택지가 그나마 나은 답인지 헤아리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2000년대 중반부터 남녀 고용평등, 일과 가정 양립에 대한 정부 계획이 수립되고 정책들이 실행되었지만 일자리와 양육의 책임에 대한 불평등은 전혀 개선되고 있지 않다.

한 사회의 관습, 규범, 제도와 정책은 서로 결합하여 그 안의 개인들의 행동방식을 구속시켜버리는 효과를 가진다. 오래된 제도들은 한번 결합되면 스스로 변하지 못한다. 매우 파격적인 외부 충격만이 굳게 뿌리내린 불평등에 균열을 가지고 올 수 있다.

새 정부는 하늘의 절반을 받치고 있는 여성들의 평등 실현 없이는 우리나라에 민주주의와 복지국가가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여성은 다만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 아기를 낳고 양육하고, 나쁜 일자리를 채워 고용률을 높이고, 남성을 내조하기 위해 하늘 아래 함께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승윤 이화여대 교수 사회복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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