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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체투지하는 모습을 굴뚝에서 봤다. 아니 봐버렸다. 정지된 사진 속에서 노동자들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고 얼고 있는 몸 덩어리는 격렬하게 떨고 있었다. 어떤 순간을 지날 때는 강렬한 에너지가 생겨난다. 그 에너지가 세상을 움직이고 생명을 이고 있다. 심지어 죽은 이들의 뇌에도 20와트의 에너지가 남아 자신의 죽음을 끊임없이 묻는데 말이다. 이들은 그저 가엽고 불쌍한 연민의 대상인가. 이들에게 부여되는 약한 이들이란 수식은 온당한 배열구조인가. 에너지를 생산하고 발산하는 이들이 어떻게 약하고 가여운 존재일 수 있는가. 그들은 자신의 발로 삶의 풍차를 밟고 손으로 생의 물레를 돌리고 있다.

아난드 마힌드라 회장이 인도로 출국한 이후 교섭의 장이 열렸다. 문은 열렸지만 아직 테이블은 놓이지 않았다. 굴뚝 외벽 은박지 위에 “Let’s talk” 내걸고 밥 보따리 허공에 매달아 둔 지 8일째 아침을 맞는다. 굴뚝에 오른 지 40일이 되는 날이기도 하다. 바람은 탄력을 잃은 피부 가죽 틈을 더욱 밀고 들어오고 차가운 눈 덕분에 몸은 퉁퉁 불었지만 무게는 오히려 줄어 있다. 비상식량으로 버틴다. 호언장담한 지 3시간이 지나자 물색없는 손이 바짝 마른 아몬드 한 움큼을 쥐었다. 육포를 산짐승처럼 뜯는 이빨 사이로 잘 견딘다는 말이 새어나온다. 결심이 약한 건가. 다짐이 부족한 건가. 라이터 불로 신문지 태우고 별보며 하얀 밤을 불사른다. 순간순간이 타협이고 하루하루가 뒷걸음이다. 스러진 승리를 세우겠다는 그 말 한마디만 끌어안은 채 다른 말은 온몸으로 태워 추위를 견딘다. 생존자들이 빼다 버렸을 간과 쓸개의 무덤을 오늘도 두 발로 꾹꾹 밟는다.

교섭의 장으로 들어서는 노동자를 생각해본다. 말끔한 넥타이에 손 벨 것 같은 양복 깃을 한 이들이 맞은편에 앉는다. 검은 잉크가 가득 찬 만년필과 삼색의 필기구가 가지런하다. 깨알 같은 자료에 악마를 숨겨둔 채 통계는 입맛따라 화면에 띄워진다. 대형 로펌은 식은 죽 먹듯 법을 설파하고 경제지는 나라 망한다 경적 소리 윤전기에 넣고 요란하게 돌려댄다. 쌍용차 회계조작 보검은 대법원이 나서서 부러뜨렸고 방패는 정치가 내다버렸다.

어딜 봐도 첩첩산중이고 망망대해다. 사람의 열기로 자본의 광기를 잡기엔 아직 우리의 광기는 평범한 평신도 수준이다. 정의는 정신승리 안에만 머무르고 저들과의 전장으로 출전하지 않고 있다. 포기할 말과 벼려야 할 말을 구분짓고 목록을 매겨 비닐로 꽁꽁 싸매 쟁여둔다. 자기 사건, 자기 인생에서 살아남는다는 건 비루한 일상과의 협상이고 어떤 버림이며 이별이다.

피해자의 언어는 따로 없다. 전복의 말 또한 어딘가에 존재하지 않는다. 매 순간 치열하게 살아내는 삶이 언어고 발 딛는 한 발 한 발이 자음과 모음이다. 관전평은 이 질긴 싸움이 끝난 뒤에 질기게 하도록 남겨두자. 협상의 언어, 협상의 말을 찾고 있다. 저들이 말해야 할 사과의 단어와 속죄의 문구 또한 찾아 줘야 한다. 교환된 말들과 단어들이 저들 손에 쥔 만년필 잉크를 줄일지 우리가 들고 있는 볼펜을 닳게 할지가 남아 있는 문제다.

그러나 바둑판 위 하얀 돌과 검은 돌의 차이는 딱 한 집 승부일 수 있다. 승부는 그렇게 날 것이다. 수많은 돌 하나하나를 따지고 겁박하는 건 그래서 아둔한 일이다. 모두 의미 있는 돌이고 목적 가진 사석이다. 이제 우리는 7년 만에 비로소 마주 앉을 것이다. 초시계가 움직였다. 차분하게 한 수 한 수 그렇게 놓고 다지자. 아낌없는 응원과 격려를 원한다. 잘한다 잘한다 칭찬 듣기 원한다. 그렇게 가보자.

대법원 망치로 머리가 깨지고도 아직 나에게 힘이 남아 있다는 것과 아직도 해 볼 일이 남아 있다는 것에 스스로 놀랐다. 도망치고 싶다는 마음의 소리엔 무엇인가 내게, 우리에게 남은 할 일이 있다는 소리가 섞여 있었다. 우린 굽힘 없이 싸웠지만 우리를 위해 준비된 의자는 없었다. 그 의자에 가지런히 두 손을 무릎에 얹고 앉아, 살아가기 위해 떨리는 무릎을 가눌 그 풍경에 우린 아직 서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 틈새가 보였고 비집고 들어가 앉았고 거기가 우리의 삶의 터전을 지키는 마지막 ‘공간’이 될 것이라 다짐했다. 모든 장소는 시간의 이름이라 했다. 어떤 시간 위에 지금 우리는 앉아 있고 매달려 있나. 24시간 꼬박 오감을 열어둔 채 40일을 견딘다. 그 어느 때보다 살아 있음을 느낀다. 피곤하지 않고 졸리지 않다. 흐르는 시간을 막아서고 싶고 지난 시간을 잡고 매달려 보고도 싶다.

정리해고 비정규직법 전면폐기를 위한 오체투지 행진단이 8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쌍용차 해고자 복직과 정리해고 철폐를 요구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나는 오늘도 분노와 공포를 허접하기 이를 데 없는 시 속에 숨겨 흘려보낸다. 살아남기 위해 버려야 할 것들과 놓지 말아야 할 것들을 떠올려 보고 다짐한다. 거짓말처럼 버리면 버릴수록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차오르고 강해진다. 그 어느 때보다 자신의 삶을 살아내고 있는 모든 착한 이들의 지혜와 영혼의 움직임이 절실하다.


이창근 |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정책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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