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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그럴 리가. 아마도 풍자 퍼포먼스이겠지.”
주말 연예 프로그램이나 봉사 프로그램에 출연해 인자한 미소를 짓던 ‘디자이너 선생님’이 착취 사업가라니…. 하지만 사실이었다. 패션업계에서 일하는 젊은이들은 최근 ‘2014 청년착취대상’ 수상자로 유명 디자이너 이상봉을 선정했다. 이들은 올해가 이상봉 브랜드를 론칭한 지 30주년이 되는 해라면서 30년에 가까운 착취로 오늘날의 부와 명예를 쌓아 올렸다고 했다.
이들이 폭로한 이상봉 소유 패션업체의 근로조건은 놀랍다. 견습 10만원, 인턴 30만원, 정사원 110만~130만원이다. 주말 근무나 야근에 따른 수당은 전혀 없다. 식대로 6000원을 준다고 하나 한 달 10만원의 월급은 밥 먹듯하는 야근 교통비도 되지 않는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디자이너를 꿈꾸는 젊은이들은 유명 디자이너의 재능을 보고 배우며, 경력증명이라도 갖기 위해 디자이너 사무실을 찾는다. 그러나 도제 두세 명이 장인과 함께 지내며 기술을 전수하던 중세 유럽의 공방을 상상하면 곤란하다. 이들은 한 땀 한 땀 명품을 디자인할 재능을 배우지 못한다. 패턴을 베낀다든가 해외의 유명 패션잡지를 보는 정도가 고작이다. 100명이 넘게 일하는 산업화된 패션기업에서 장인의 기술을 배우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다. 결국 변변한 기술을 배우기는커녕 오히려 적자만 보고 중도에 다른 길을 찾는다.
이상봉회사에서 일했다고 하는 청년의 말이다. “2011년 유학 마치고 들어와 첫 직장이었다. 토요일 출근은 기본, 퇴근시간은 보내주는 사람 마음, 월급이 얼마인지도 모른다. 개인 돈으로 차비까지 쓰다 못해, 그림 그리고, 사진 찍고, 피팅 모델에, 동대문 원단시장 심부름까지 하다 이게 노예지 싶어 나왔다.”
디자이너가 된다는 희망과 열정에 사비까지 써가며 일하지만 기대와 다른 현실의 벽과 마주치게 된다.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희생을 강요당한다.
지난해 말 한 취업포털은 채용시장을 반영한 신조어로 ‘인구론’(인문계 졸업생 90%는 논다), ‘돌취생’(입사 후 다시 취업준비생으로 돌아온 사람), 이퇴백(20대에 스스로 퇴직한 백수)과 함께 ‘열정페이’를 소개했다.
열정과 페이(pay)의 조합어다. 듣기에 생기발랄한 이 단어에는 섬뜩한 착취구조가 숨어있다. 열정페이란 무급 또는 아주 적은 월급을 주면서 취업준비생을 착취하는 기업을 비꼬는 말이다. ‘열정이 있으면 돈을 조금만 줘도 된다’는 인식에서 출발했으며 패션업계에서는 관행이다.
열정페이의 계산법을 보자. “너는 어차피 공연을 하고 싶어 안달이 났으니까 공짜로 공연을 해라.” “너는 경력도 없으니까 경력도 쌓을 겸 내 밑에서 공짜로 엔지니어를 해라.” “너는 원래 그림을 잘 그리니까 공짜로 초상화를 그려 줘라.” 열정만 있고 페이는 없다. 그래서 스스로를 ‘무급 노비’라 부르기도 한다.
못된 것은 빨리 배운다. 최근 한 편의점 점주도 가세했다. 점주의 채용 공고를 보자. “전화로는 시급을 말씀드리지 않는다. 돈 벌기 위해 편의점 근무를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열심히 한 만큼 챙겨드리겠다.” 편의점은 스펙을 쌓으러 가는 곳이 아니다. 돈이 필요해 편의점에서 일하는 아르바이트에게 최저임금도 보장하지 않고 열정을 요구하는 것은 가당치 않다.
그뿐인가. 외교부 산하 한 총영사관은 인턴직원을 채용하면서 3개월간 무급 조건을 당당히 내걸었다가 “차라리 봉사자를 찾는다고 하라”는 등 누리꾼들의 뭇매를 맞았다. 열정페이는 이상봉 디자이너와 같은 패션업계, 이미용업계뿐 아니라 대기업과 공공기관 등에서 횡행하고 있다. 취업준비생들은 국가기관 인턴 경험이라는 스펙 한 줄을 넣기 위해 무급인턴에 열정을 팔고 있다.
취업이 어렵기 때문이다. 14일 정부 발표에 따르면 청년 실업률은 1999년 통계기준이 바뀐 이후 가장 높은 9%에 달한다.
청년유니온과 패션노조 회원들이 7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패션업계에 종사하는 청년들의 열악한 근로환경을 설명한 뒤, '2014 청년착취대상'을 시상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패션노조는 공개댓글 투표를 통해 이상봉 디자이너를 수상자로 선정했다. (출처 : 경향DB)
노동에는 합당한 보상이 뒤따라야 함은 불문가지다. 교육생도 마찬가지다. 지금이 어느 때인가. 무림의 고수가 되기 위해 절에 들어가 물 긷고, 장작 패고, 빗자루를 잡으며 감내하던 시대가 아니지 않은가.
차라리 패션학원을 차려 돈을 받고 수강생들에게 기술을 전수하고, 허드렛일은 정당하게 직원을 채용해 시키는 것이 떳떳하다. 교육과 관계없는 갖가지 잡무로 부려먹고 되지도 않을 꿈을 부풀게 만들어 ‘희망고문’을 하는 것보다. 강요된 열정은 열정이 아니다. 사장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됩니다.
박종성 경제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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