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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설 경보라도 내린 듯 문자가 푹푹 쌓인다. 수백 개로 늘어난 트위터 쪽지 창은 다닥다닥 줄지어 늘어선 쪽방촌이 됐다. 뉴욕에서 독일에서 인도에서 수천의 손길이 파란 담쟁이넝쿨처럼 이곳 굴뚝으로 뻗어 오르고 있다. 문자 해독에 지친 휴대폰은 서너 번을 기절했고 배터리는 시간 단위로 갈아 채웠다. 태양은 정수리 위에 조명으로 걸려 있고 바람은 소리를 참았다. 마힌드라 아난드 회장이 이틀 전 입국했다.
회사는 그의 일정과 동선을 함구했다. 세계적 경제지 포천이 선정한 50대 기업인 아난드 회장은 그렇게 소리 소문도 없이 서울 모처에서 여장을 풀었다. 자신이 대주주로 있는 쌍용자동차에 007작전으로 들어오게 된 그의 마음을 생각하며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봤다.
아난드 회장이 인도발 한국행 비행기에 발을 올려놓은 그 시간. 쌍용차 굴뚝에선 힌디어를 다듬고 영어를 찾아 알맞은 문장을 만들고 있었다. 비행기 안에서 한국에 대한 그리고 쌍용차 해고자에 대한 안내문을 손에 쥐여 주고 싶었다.
서툰 힌디어를 트위터에 올리고 영문을 올렸다. 사진을 고르는 손끝이 떨렸다. 이 기회를 놓치면 들이닥치게 될 한파 때문이었다. 아난드 회장과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 우리 사정을 봐 달라는 손짓을 하고 싶었다. 쌍용차를 인수한 2010년 이후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영국과도 바꾸지 않는다는 간디의 나라 인도. 영성과 명상으로 휴양림 같은 삶의 속도 조절기인 인도 회장의 생각이 궁금했다.
쌍용차 조합원들이 아침부터 분주하다. 현수막을 챙기고 신발을 담는다. 서글픈 분주함이며 서러움의 재빠른 손길들이다. 쌍용차 해고자들은 왜 26켤레의 신발을 준비했을까. 먼지가 쌓이고 뒤틀려 모양조차 우습게 생긴 신발을 기자회견장에 왜 들고 갔을까. 5박6일간 오체투지를 해 동태가 된 몸으로 그들은 다시 현수막을 들고 신차 출시 장소 앞에 가지런하게 섰다. 현수막 앞으론 26켤레의 신발이 범죄 수사 현장처럼 모두가 번호를 달고 누워 있다. 1, 2, 3, 4…25, 26… 이 숫자는 이것으로 끝인가.
마침표 없는 이 숫자의 항렬이 낡은 신발 안으로 들어갔다. 목발이 있었다. 여성용 하이힐이 있었고 용접 불꽃을 맞아 구멍이 숭숭한 안전화가 있었다. 고무신이 여름을 떠올리게 했고 슬리퍼가 욕실을 증거했다. 인도 속담엔 “그 사람의 신발을 신어 보기 전에는 그 사람의 발에 대해 어떤 말도 하지 말라” 했다. 아난드 회장은 이 신발을 보았을까.
지난 1월11일 굴뚝데이가 열렸다. 역 앞에서 굴뚝을 응원하는 역전의 용자들이 등장했다. 사방팔방 동서남북에서 해외에서 피켓을 만들어 웃으며 즐겁게 서 있는 모습을 봤다. 그 착한 온기가 달과 별에 방향을 알려 주고 바람은 지쳐 있는 등을 밀어 앞으로 가게 했다. 피켓을 만들고 글씨를 적어 내려갔을, 그 착한 손들을 떠올려본다. 사라진 것 같았던 지난 7년이 소중하게 잘 보관되었다는 믿음이 생겼다. 찬 기운이 뼛속까지 파고드는 서울 한복판 도로 위에서 머리를 찧고 팔다리 끌고 배 밀어 갔던 수많은 노동자들에게도 큰 위로와 포옹이었다.
쌍용차 문제는 많이도 묵은 문제다. 오죽했으면 백약이 무효했고 아편도 듣지 않았다 푸념을 늘어놨겠는가. 그만큼 될 듯 될 듯 사람 애간장 녹였던 지난 시간이었다. 그래서일까. 절망을 비워낸 그 공간만큼이 우리에겐 희망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힘겹게 밀어 올린 돌덩이가 다시 산 아래로 굴러떨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확신 하나는 생겼다. 다시 굴러 내려오는 돌덩이라 하더라도 다시 밀어 올릴 착한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과 적어도 굴러떨어지는 돌에 깔려 죽지는 않겠다는 확신과 믿음이다. 이것은 기정사실로 굳어졌다. 또한 쌍용차 해고자 복직과 26명 희생자에 대한 사과와 대책은 아주 작은 문제란 사실이다. 우리는 지금 어떤 가치 앞에 서 있다. 목표가 같지 않을 때 오히려 우린 더 강해진다는 것을 안다.
13일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린 쌍용차 SUV 티볼리 신차발표 행사에서 쌍용차의 모회사인 인도 마힌드라&마힌드라 그룹 아난드 마힌드라 회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아난드 회장이 기자회견장 앞에 놓인 신발을 봤다면 대화는 시작된 것이다. 문제 해결이 급물살을 탈 수도 있고 주저앉을 수도 있다. 관심 가져 달라. 그러나 여러분의 관심에도 주목해 달라. 굴뚝도 쌍용차 문제도 나아가 노동 문제와 삶의 문제에도 애정하고 있다는 여러분 자신을 주목해 달라.
우리를 돕고 지원하고 애정해 주시는 것 고맙다. 이젠 이 싸움 끝내고 싶다. 그래서 부탁드린다. 여러분께 나눠드릴 갑옷은 없다. 각자가 준비해 달라. 이 싸움을 통해 무엇을 다시 살려내고 싶은지 여러분 각자의 영혼에 귀 기울여 달라.
이창근 |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정책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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