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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불쑥 나타난 건 이주민 한글학교 공부방 마당에 낙엽이 굴러다니고, 마당 텃밭에 키운 채소가 첫서리를 맞아서 시들부들해진 늦가을이었다. 그는 아침 일찍부터 공부방에 나와 어린아이들과 놀고 있었다. 그는 공부방에 들어오는 아이들과 인사를 할 적마다 자신의 이름을 또박또박 알려줬다.

“미화 수녀야. 미화 수녀라고 부르면 돼.”

안식년이라서 토요일마다 공부방 일을 돕기로 했다는 그는 안식년에 일하면 안식할 수 없는 것 아니냐는 말에 손뼉을 치면서 깔깔 웃었다. 그 웃음소리에 낯섦이 저만치 물러난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아이들은 금방 그를 따랐다. 그는 투정 부리는 아이를 웃으면서 잘 달랬고, 장난감을 들이민 아이들하고는 아주 진지하게 놀아줬다. 간혹 아이들의 짓궂은 장난에도 얼굴 한 번 찌푸리지 않았다.

오랫동안 그는 필리핀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아이들을 돌봤다고 했다. 척박한 오지에 제 손으로 학교를 짓고 밤낮없이 일하는 종교인의 경건한 삶을 담은 다큐멘터리 한 장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필리핀에서 아이들과 지내며 생긴 일을 얘기할 때 그의 얼굴에는 역경을 묵묵히 이겨낸 수행자의 고단함이 조금도 드러나지 않는다.

“거기 애들이 얼마나 예쁘고 똘똘한지 몰라요. 애들하고 놀면서 필리핀 말 배울 때 정말 재미났어요. 아, 거기는 과일이 정말 맛있어요. 애들도 무척 보고 싶고, 과일도 생각나요.”

그의 말을 듣다 보면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이국땅에 슬금슬금 끼어들게 된다. 타갈로그 말을 하는 반짝거리는 아이들과 잘 익은 과일 냄새로 뒤덮인 거리와 별이 쏟아질 것 같은 밤하늘, 그리고 깔깔 잘 웃는 미화 수녀가 있던 그곳이 바로 옆 동네일 것만 같다.

“안식년이 끝나면 다른 나라로 가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으로 갈 거예요.”

그가 곧 공부방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무척 아쉽다. 틈날 적마다 부엌으로 들어와서 요리를 제법 한다고 큰소리치고는 어설픈 칼질을 하던 그가, 공부방에 오지 못한 아이들을 보려고 집까지 찾아다니던 그가, 신의 존재를 물으면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던 그가 오래오래 생각날 것 같다.

<김해원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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