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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여고생들이 독후감을 발표하는 자리에 있었다. 학생들은 책을 읽으면서 느낀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냈다. 마지막으로 나온 학생은 성추행당한 주인공이 나오는 소설을 읽은 뒤 많은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우리는 여자로 살면서 성희롱이나 성추행을 흔히 겪잖아요. 그런데 다들 그런 일이 여자 탓인 것처럼 말해요. 짧은 치마 입지 마라, 늦게 다니지 마라.”

그의 말에 스무 명 남짓 되는 아이들이 대개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굳이 묻지 않아도 짐작이 되었다. 그들의 할머니가, 어머니가, 언니가 감내한 일이었으니까. 나 또한 그랬으니까. 그리고 그들은, 나는 딸에게 쉽게 말했다. 네 몸가짐을 잘하라고.

“그런데 그건 엘리베이터 안에서 배달되는 치킨 냄새가 좋아서 덥석 집어먹고는 치킨 탓을 하는 것과 똑같잖아요.”

그의 말에 아이들이 깔깔 웃었다. 치킨을 탈취한 자가 무죄라면 빵을 훔친 장발장은 무죄가 되는 것인가? 그렇다면 치킨이 유죄인 것인가? 떠들썩한 아이들 속에서 나는 내 안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기억들을 마주해야 했다. 여고 시절 점을 봐주겠다면서 아이들의 귀밑머리를 넘겨 귀를 만지고 돌아다닌 미술 선생님과 버스 안에서 엉덩이를 만진 아저씨한테 나잇값을 하라고 소리친 친구한테 도리어 당돌하다고 혀를 찬 어른들과 차 안에서 머리를 기대고는 예전부터 네가 좋았다고 한 상사와 회식 자리에서 억지로 블루스를 추자고 한 거래처 부장과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이들의 뻔뻔하고 무례한 얼굴들. 불쾌하고 모멸감이 드는 기억들은 내가 뭘 잘못한 건 아닌가 자책했던 기억들과 뒤엉킨 채 단단히 똬리를 틀고 있어 쉬 풀어헤쳐지지 않았다.

그때 그가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 잘못이 아닌 거잖아요. 나는 우리가 무슨 일을 겪더라도 당당하게 말하고 싸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맞다. 그건 내 잘못이 아니었다. 부끄럽게도 내가 너무 오래 살아보고 깨달은 것을 열여덟 살의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열여덟 살의 그도, 지금 세상과 싸우는 성추행 성폭행 피해자들도 모두 내게는 스승이다. 그들을 지지한다.

<김해원 |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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