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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황학동 도깨비시장을 돌아다니다가 헌책을 부려놓은 곳에서 누렇게 빛바랜 일기장을 찾아냈다. 1977년에 발간된 한 어린이 잡지의 2월호 특별 부록인 ‘학습일기장’에는 연필로 꾹꾹 눌러쓴 글씨가 빼곡했다. 겉표지는 떨어져 나가고, 떡제본 된 책등은 벌어져 나달대는 일기장이 어떻게 세상을 돌고 돌아 헌책 사이에 버젓이 끼어들어갔는지 알 수 없었다. 본래 이런 일기장의 숙명은 땅속에 파묻는 김장김치처럼 책상 서랍에서 묵혀졌다가 골마지 낀 묵은 김치 퍼버리듯 버려져 어느 고물상 한 구석에서 불리고 갈아져 사라지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아이는 어린 시절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왕년의 삶은 꽤 괜찮았다고 믿는 어른이 되는 것이다.

쪼그리고 앉아 건성으로 일기장을 들춰 보자 어디선가 달려온 가게 주인이 일기장 값을 두툼한 헌책보다 훨씬 비싸게 부르면서 말했다. 그런 건 어디서도 구할 수 없다고. 본래 남의 일기장을 구할 생각 따위는 없었던 나는 일기장 값을 치르고는 재빠르게 가방에 욱여넣었다. 주운 일기장을 판다는 것은 명백하게 불법 거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0여년 전 내 또래였을 아이의 일기장을 훔쳐보고 싶은 호기심을 털어버리긴 어려웠다. 그의 일기는 담임선생님이 서울로 새마을 강습을 받으러 가서 교무 선생님이 체육 수업을 했다는 4월 봄날부터 시작된다. 그는 수업 시간에 떠들어 혼난 일이며, 피리를 사달라고 했더니 “네 할 일에 충실하지도 않은 녀석이 뭘 사달라고 하냐?”며 퉁바리를 준 아버지 얘기를 솔직하게 적었다. 그러면서 그는 일기의 끝을 늘 반성과 다짐으로 마무리했다.

앞으로는 담임선생님이 없어도 공부를 잘하겠다거나 다음부터는 몸을 깨끗하게 하겠다거나, 보다 명랑한 생활을 하겠다던 아이는 어떻게 자랐을까? 그 아이는 자신의 다짐대로 성실하고 부지런하고 게다가 명랑한 어른이 되어서 지금도 밤마다 하루를 되돌아보면서 반성하는 걸까? 그러고 보니 나는 일기를 쓰지 않을뿐더러 내 잘못은 반성하지도 않으면서 남한테는 ‘네 할 일을 충실히 하라’는 잔소리를 쉽게 하는 뻔뻔한 어른이 되어 버렸다.

<김해원 |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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