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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내가 살던 면소재지에는 주말이면 유황 온천물에 몸을 담그려고 오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기차역이 있었고, 기차역 앞에는 우체국과 전신전화국이 같이 쓰는 건물이 있었다. 그 건물은 기차역사보다도 크고 번듯했지만, 전신전화국으로 쓰이는 방은 옹색했다. 그 방에서 일하던 전화교환원은 고작 두 명이었다. 그들은 하루 종일 교환대 앞에 앉아 전화선을 연결해줬다.

동네마다 전화기를 놓은 집이 몇 되지 않던 때라 전화번호부가 A3 사이즈 종이 한 장으로 충분했지만, 시골 사람들은 그 간단한 전화번호부조차 들여다보는 법이 없었다. 그들은 수화기를 들고 교환원과 연결되면 전화번호를 말하지 않고 대뜸 신언리 박 아무개라든지 장터 고무신 가게라든지 통화하고 싶은 이의 이름을 댔다. 때로는 이름이 가물가물해서 그 집이 이씨여 김씨여 어물대도 교환원은 용케 맞는 번호를 찾아 연결해줬다.

고객의 모든 전화번호를 달달 외우고 있었던 교환원의 맹활약은 전화번호부가 꽤 두꺼워졌을 때까지 이어졌다. 어쩌면 그들의 전화번호 암기 실력은 수년간 갈고닦으며 전화선을 꽂는 손놀림만큼이나 능수능란해졌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자동교환식 전화기가 나오면서 세상은 더 이상 그들의 출중한 능력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

며칠 전 해외로 소포를 보내려고 우체국에 갔는데, 우체국 직원이 인터넷으로 사전접수를 하면 5%나 할인해 준다면서 휴대폰에 직접 우체국 앱을 깔아줬다. 그는 서투른 나 대신 앱으로 사전접수를 해주면서 내년부터는 무조건 사전접수를 해야 할 거라고 했다. 그러면 아무래도 우체국 직원들이 일하기는 좋겠다는 내 말에 그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니 저희가 할 일이 없어지는 거지요. 여기 일자리가 확 줄어들 거예요.”

그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어릴 적 전화교환원이 생각났다. 그 시절 전국의 전화교환원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아래서 편지를 쓰는 낭만은 사라진 지 오래. 앞으로는 우체국에 가면 편리하고 재빠르나 무표정한 수납기만 늘어서 있을지 모른다.

<김해원 |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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