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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한국전쟁 때 혈혈단신 남으로 내려와 피붙이 한 명 없는 땅에서 팔십 평생을 꿋꿋하게 살아왔다. 결혼하고 나서 세운 공장이 꽤 잘 되어서 자식들 남부러울 것 없이 먹이고 입혔다. 부인은 다락방에 네 딸 결혼시킬 때 싸줄 그릇이며 냄비를 착실하게 모았다. 혼자 부초처럼 떠돌던 젊은 시절을 생각하면 출세한 거였다. 그래도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일했다.

하지만 암에 걸린 부인은 다락방에 차곡차곡 쌓아 놓은 그릇과 결혼하지 않은 딸들을 남겨놓은 채 세상을 떴다. 그는 아무런 꿈 없이 공장과 집을 오갔다. 그는 변하지 않는데, 하던 일도 그대로인데 세상은 빠르게 변했다. 머리 굵은 자식들은 그가 말만 꺼내면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라고 퉁바리를 줬다.

그의 세상과 아이들의 세상이 다른 것 같았다. 아이들이 뭐라 하든 그는 자신의 세상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다. 아니 그럴 틈이 없었다. 공장 기계는 쉬지 않고 돌아갔으니까. 어느 날 거울을 보니 백발이 성성하고, 어깨 굽은 이가 서 있었다. 마음은 세월에 부대끼면서도 악착같이 버텼는데, 육신은 세월을 어겨내지 못했다. 그는 공장 경영을 자식에게 맡기고 공장 안을 기웃거리면서 일손을 도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 물정 잘 아는 자식은 공장을 팔아버렸다.

자식들은 일도 할 만큼 했고, 땀도 흘릴 만큼 흘렸으니 느긋하게 쉬시라고 했다. 그도 그리 해보려고 했다. 하지만 몸이 예전 같지 않았다. 허리가 아프다 싶으면 무릎 관절이 쑤셔댔고, 몸이 괜찮다 싶으면 자꾸 기억이 흐릿해졌다. 그는 멈춘 기계가 얼마나 빠르게 녹스는지 알고 있었다. 그의 몸도 하루하루 녹슬어 가고 있었다.

아침저녁으로 음식을 해서 찾아오는 막내딸은 아버지 몸의 흘게가 풀리는 것처럼 보였다. 저러다 영영 못 일어나시겠구나. 딸은 눈시울을 붉히다가 퍼뜩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저리 힘든 몸으로 오래 사시면 어쩌나.

“그런 생각을 한 내가 정말 밉더라고요.” 그의 말을 들으면서 가슴이 아렸다. 그들의 이야기는 곧 내 부모와 내 이야기가 될 테고, 또 오래지 않아 나와 내 딸이 겪을 것이다.

<김해원 |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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