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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 1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한때 그곳은 휴일이면 관광버스가 줄지어 드나들던 이름난 온천이었다. 그곳에서 맨 먼저 생겼다는 목욕탕의 이름은 그냥 온천탕이었다. 온천탕은 사시사철 몰려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손가락 끝이 쭈글쭈글해질 때까지 탕 안에 들어가 앉아 있다가 나온 사람들은 목욕탕 안마당에 있는 수돗가에서 유황 냄새나는 물을 물통에 받느라 줄을 서곤 했다. 그 동네에서 나고 자란 할머니는 으리으리한 목욕탕이 우후죽순으로 들어서도 허름한 온천탕으로 다녔다. 할머니는 늘 설을 쇠러 온 손녀들한테 솜을 두껍게 넣고 누빈 버선을 신겨 온천탕에 데려갔다.

평생 농사를 지은 할머니의 손힘은 어찌나 억센지 손녀들의 등짝을 시뻘겋도록 밀고서도 끄떡없었다. 목욕을 다 하고 나오면 할머니는 유황 냄새나는 약수를 질색하는 손녀들한테 우유를 하나씩 사서 쥐여줬다. 볼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손녀들은 우유 하나를 먹고 목욕탕에 올 때처럼 할머니 뒤를 졸졸 따라 집으로 돌아가는데, 1시간은 족히 걸어야 했다. 흙탕물이 밴 지저분한 눈은 바짓부리에 엉겨 붙어 걸음을 뗄 적마다 어석버석거렸다. 성미 급한 할머니는 휘적휘적 저만치 앞서 걸었다. 손녀들이 힘들다고 해도 쉬어가는 법이 없었다. 신작로에서 샛길인 자드락길로 들어서면 할머니는 그제야 뒤를 힐끗 돌아보며 돌부리에 걸리지 않게 조심하라고 일렀다.

할머니는 세상을 떠나신 지 오래되었고, 고향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다. 할머니가 등을 밀 때마다 아프다고 짜증 내던 손녀가 반백년을 살았으니, 설음식 만드느라 목욕탕 갈 틈도 없이 며칠 동안 부엌에서 종종걸음치던 새파랗게 젊었던 내 어머니는 할머니가 되었다.

내 어머니는 설 쇠고 온 딸을 내 할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산 너머 온천에 데려갔다. 앉을 틈도 없는 곳에서 빈자리를 잘도 찾아낸 어머니는 맨 먼저 딸의 등을 밀었다. 얼마나 세게 미는지 쭈그리고 앉아 있던 딸은 그만 제 나이를 잊고 아파 죽겠다고 몸을 뒤틀 뻔했다. 따끔거리는 등에 차가운 물을 끼얹다 설핏 보니 내 어머니는 내 할머니와 닮아 있었다. 할머니는 떠나셨지만, 여전히 내 등을 밀어줄 어머니가 그곳에 있었다.

김해원 |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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