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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내아들을 둘러업고 야학당에 가서 딱 하룻밤 한글을 배웠다는 우리 할머니는 읽을 줄은 알아도 쓸 줄은 모르셨다. 야학당에 하루만 더 나갔어도 쓰는 것까지 배웠을 텐데 그러지 못한 것을 평생 아쉬워한 할머니는 모든 것을 종이 대신 머릿속에 기록하셨다. 특히 금전 거래에 예민하셨던 할머니의 장부는 남편의 자전거포 도매상 거래 출납과 소소한 자전거 수리비까지 단 1원의 오차도 없었다.

완전무결했던 할머니 기억에 빈틈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어느 해 지독한 여름 더위가 지나간 뒤였다. 할머니는 내 옆에 앉아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다가 한숨을 내쉬면서 말씀하셨다. “너도 일만 하지 말고 어서 애를 가져야 할 텐데….”

할머니 옆에는 기어 다니기 시작한 내 딸아이가 바동대고 있었다. 할머니의 기억은 가까운 곳에서부터 솔래솔래 빠져나갔다. 할머니는 증손녀와 손녀를 까맣게 잊으셨지만 호적에 당신의 이름을 ‘이씨’라고만 기록했던 게으른 면서기의 이름은 또렷하게 기억하셨다.

다문화 공부방 소풍에 따라오신 할머니도 몇 해 전부터 기억이 뭉텅뭉텅 지워지고 있었다. 자식들을 키우면서 큰소리 한 번 낸 적이 없다는 점잖은 할머니는 그림 그리는 아이들 사이에 끼어 앉아 크레용을 손에 쥐셨다. 할머니는 둘레에 앉은 아이들의 그림을 슬쩍 넘겨다보면서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셨다. 할머니의 도화지에는 양갈래로 땋은 머리를 늘어뜨린 여학생이 있었다. 흰 여름 교복을 입은 해사한 여학생의 가슴에는 명찰도 달려 있었다. 누굴 그리신 거냐고 묻자 할머니는 수줍게 웃으셨다. “이게 나예요.”

할머니의 기억은 아침마다 물 묻힌 참빗으로 머리를 곱게 빗어 내리고, 빳빳하게 풀 먹인 교복을 입던 그 시절에 머물러 있었다. 할머니 그림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예순 넘은 따님이 명찰에 적힌 어머니의 이름을 되뇌며 중얼거렸다. “다행이죠. 이름을 기억한다는 것은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거니까.” 모르긴 몰라도 알츠하이머를 앓으면서 긴 회고록까지 지어낸 그도 자신의 이름은 분명하게 기억할 것이다. 그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대대손손 우리가 기억해 줄 테니까.

<김해원 |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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