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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 3가 지하철역에서 낙원상가로 가는 길은 이른 아침부터 부산하다. 식당들은 문 열 채비를 하고 있고, 땅콩과자를 파는 포장마차도 벌써 장사를 시작했다. 짐을 나르는 오토바이와 자전거가 오가는 틈으로 노인들이 바삐 걸어 다녔다. 옛날 영화 속에서나 봤을 법한 흰 양복에 흔히 백구두라 불리는 구두까지 갖춰 신은 노인을 마주치고는 문득 둘러보니 낙원상가 앞은 시간이 멈춰있는 것 같았다. 허름한 4층 건물에는 1980년대에 흔히 있었던 의상실, 기원, 도장 파는 집이 있었고, 식당의 낡은 간판들은 언제부터 매달려 있었는지 감감해 보였다.

그 길모퉁이를 돌아 낙원상가 4층으로 올라가면 허리우드 실버극장이 있다. 영화 첫 상영 시간에 맞추려고 종종걸음쳤는데, 이미 10분이나 늦어버려 그냥 갈까 말까 망설이면서 극장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 타고 보니 지각한 관람객이 꽤 많았다. 모두 노인들이었다. 한 노인은 영화표를 사면서 굳이 뒷자리를 달라고 했다. 표를 내주는 이는 영화가 시작되었으니 빈자리에 앉으시라고 해도 뒷자리에 앉아 좀 쉬려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극장 안에 들어가 보니 그럴 일이 아니었다. 앞이고 뒤고 빈자리가 많아서 어디든 앉을 수 있었다.

스크린에 비치고 있는 영화는 1960년대 만들었다는 흑백영화였다.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한 영화는 단조로운 색만큼이나 무료했다. 그런데도 내 앞에 앉은 노인들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쉬려고 왔다던 노인은 어처구니없는 장면에서 가장 크게 웃었다. 졸다가 그 웃음소리에 잠이 깼다. 괜한 일에 화를 내고 헤어지려는 영화 속 남녀 주인공을 맥없이 따라가다 보니 오래전 텔레비전으로 보던 명화극장이 생각났다. 그때 본 영화들의 감동적인 장면들과 작은 창문으로 옆집 대추나무가 보이던 기와집과 그 숱한 밤의 풍경이 흑백 영상으로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어쩌면 그 극장에 앉아 있는 노인들은 영화가 아니라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떠오르는 과거를 보고 있었는지 모른다. 영화가 끝나고 불이 켜진 뒤 주춤주춤 일어서는 노인들의 모습이 쌩쌩했다. 영화 보는 내내 크게 웃었던 노인은 팔을 휘저으며 뚜벅뚜벅 걸어나갔다. 아무래도 졸았던 건 나뿐인 듯했다. 그들의 과거 여행은 즐거웠던 것인가.

<김해원 |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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